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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l 10. 2023

순례길 열여덟 번째 이야기

잭 더 챔피언

구간 : 프로미스타 -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거리 : 18.7KM
소요 시간 : 4시간


  며칠 전 로스 아르꼬스에서 머무르려다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토레스 델 리오까지 걸어간 적이 있다. 로스 아르꼬스에서 길을 나서자마자 후회했던 바로 그날이다. 나는 길을 가던 중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났고, 토레스 델 리오의 알베르게에서 다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것이 연이 되어 이틀에 한 번 꼴로 꼭 그와 마주쳤고, 가끔 같은 숙소를 쓴 적도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온 스물두 살 잭이었다. 그는 엄청난 친화력을 가지고 있어 길 위의 모든 순례자들이 그를 알고 있었으며, 대부분은 그를 좋아했다.


  그와 프로미스타에서 한 번 더 같은 숙소를 쓰게 되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마당에 설치되어 있는 탁구대로 내려가 함께 탁구를 쳤다. 한국인 두 명과 잭, 그리고 다른 외국인 친구 한 명까지 총 네 명이서 탁구를 쳤는데, 잭이 다른 세 명을 모두 이겼다. 그래서 나는 잭에게 "Camino Open Chanpionship. The Champion is Jack from US!"라고 말해주었다. 잭은 환호하며 우승 세리머니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각자 쉰 다음 내려와서 각자 친해진 일행과 저녁 식사를 했다. 



  잭의 전공은 철학이었다. 아직도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 심지어 철학이 좋아서 전공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니. 까미노에 닌텐도 스위치를 가져와 쉬는 시간이면 게임을 하던 잭이 철학을 전공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지식이 순례길을 걸으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는 순례자들에게 흥미로운 주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잭은 스페인어도 곧잘 구사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역시 거의 알아들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스페인어를 공부한 것은 불과 10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따로 프로그램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유튜브를 보고 독학하여 얻은 솜씨였다.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잭더러 언어적 감각이 뛰어나다고 칭찬하니 잭은 단호하게 그것을 배우는 10개월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노력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스페인어는 아예 할 줄 모르는 나로서는 잭이 무척이나 대단해 보였다.


  오늘 걸어가야 할 거리가 짧았기 때문에 7시가 넘은 시간에야 숙소를 나섰다. 마침 숙소 앞에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잭이 있었고 함께 핸드폰을 사용하여 도시를 빠져나갔다. 잭은 순례길을 도와주는 스마트폰 어플뿐 아니라 지도 어플조차 이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이드북을 활용하여 까미노를 걷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오늘만 보더라도 실컷 걷고 나서야 자신의 길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스마트폰 어플은 사용하지 않지만 하루의 끝에서는 닌텐도 스위치로 게임을 즐기는 철학 전공자라니. 참 알 수 없는 친구였다.



  그렇게 잭과 하루 종일 함께 걸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우리끼리만 이야기한 경우가 없던 것 같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잭이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영어에 관한 그의 생각이었다. 본인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만 세계 모든 사람들이 왜 영어를 배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각자의 언어가 있고 모든 사람이 영어를 필요로 하지 않을 텐데, 자신이 만난 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모든 사람이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잭은 여러 나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잭이 한국에 대해 묻는 것들은 철저하게 남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 군대에 대해 궁금해했는데, 대부분의 남성이 군 복무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가 어떤 분위기에서 살고 있고, 때로 분단국가의 위험이 느껴지는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랬더니 잭은 자신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Korea"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장난스럽게 "South? North?"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어떤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르면서 그 사실을 장난스럽게만 다루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자신도 분단국가로써 가지고 있는 긴장감에 대해 알지 못했고, 내 덕분에 알게 되었다고 고마워했다.


  잭과 대화하고, 그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방의 언어 수준에 맞게 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영어를 접할 기회가 그나마 많았던 나에게 잭은 다른 한국인들과 대화할 때보다 다른 속도와 다른 단어를 구사했다. 그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과는 또 다른 수준의 영어를 사용했다.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잭은 말을 잠시 멈추고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더 쉬운 단어를 선택해 이야기했다. 



  까미노의 셀럽이었던 잭의 생각을 듣고 나서 장난기 가득한 어린 청년으로만 생각했던 나를 반성했다. 모든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되지만, 잭은 어려 보였고, 호기심이 많아 보였기에 항상 가벼운 마음으로 다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며 많은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나누는 사람이었다.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어플이 없어 책을 보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조차도 여행의 과정으로 삼는 친구였다. 잭에 대해 감탄하는 도중 그가 잠시 쉬어가야겠다며 가방에서 먹을 것을 꺼냈다. 어제 그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먹고 남은 음식들이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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