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별 Jul 18. 2023

순례길 열아홉 번째 이야기

계획 변경

구간 :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 모라티노스
거리 : 29.8KM
소요 시간 : 7시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순례 여정을 마치고 나면 사람들은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피니스테라로 향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부터 피니스테라까지 거리는 총 90KM, 약 5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사실 피니스테라까지 걸어가는 사람은 소수이고 대부분 묵시아, 피니스테라 투어를 이용하여 그동안의 길었던 까미노를 마친 후 관광 정도로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순례길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 덕분인지 피니스테라와 묵시아를 가는 사람들의 후기는 굉장히 따뜻하다. 심지어 수십 일간의 까미노보다 피니스테라와 묵시아에서 묵었던 며칠이 더 좋다는 사람도 있었다. 순례길에서 얻는 굉장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하기에 그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내 계획에 피니스테라는 없었다. 피니스테라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여정이 끝인 줄 알고 모든 일정을 계획했다. 그런데 대부분 1박 2일, 걸어서는 5일을 더 가야 하는 여정이 남아있다니.. 사실 피니스테라도 이전에 도움을 준 선배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지나쳤을 것이다. 선배는 당연하다는 듯 피니스테라까지 가는 일정이냐고 물었고 나는 그게 뭐냐고 답했다. 나는 선배의 말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순례길에 온' 사람이었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까미노 닌자에서 추천해 주는 루트대로라면 나는 8월 14일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날 투어를 한다고 해도 8월 16일. 나는 파리에서 8월 17일에 출국하는 일정이었으므로 시간이 굉장히 촉박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였다. 버스를 타고 몇 개 마을을 건너뛰든지, 아니면 더 빨리 더 많이 걷든지. 아직까지 점프를 하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그 사이에 놓치게 되는 풍경과 고민들이 발목을 잡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하루에 걷는 거리를 더 늘리자.



  지금까지는 보통 20~25KM를 걸었다. 그런데 짐이 없으면 30KM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미 29.6KM를 가방 메고 걸어봤으니 짐 없이 30KM는 쉬워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어플에서 추천하는 것보다 3KM 더 멀리 위치한 모라티노스까지 걷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전날 깜빡하고 동키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꼼짝없이 짐을 들고 가야 했다. 가방을 몸에 딱 붙이고 길을 나섰다. 첫 마을이 17KM 떨어져 있었다. 약 3~4시간 동안 쉴 곳 없이 계속 걸어야 했다. 걱정과 준비를 단단히 하고 출발했는데 웬걸. 8KM 지점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푸드트럭을 만났다. 오아시스는 발견했을 때 만끽해야 할 것을. 잠깐 들를까 고민하다가 건너뛰기로 했다. 이미 17KM 사이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간식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첫 마을까지만 가면 오늘 하루의 계획 중 절반을 걸은 것이기에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걸었다. 그렇게 첫 마을을 지나고, 그다음 마을, 계속 마을을 지나쳤다. 



  그리고 오늘의 목적지인 모라티노스에 도착했다. 주요 거점 마을이 아니어서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작은 마을 들에는 식당이나 슈퍼마켓, 심지어 알베르게도 없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사람이 많이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므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들었다. 그리고 두 가지 생각 모두 현실이 되었다. 마을은 몹시 한가로웠다. 마을에는 숙소와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하나 있었는데, 한 시가 넘은 늦은 시간에 체크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먼저 와 있던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주인 분도 굉장히 친절하고 시크했다. 손님을 받는 것에 대해 큰 욕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식당 음식이 너무 맛있었던 것은 커다란 함정이었다.



  이렇게 걷는다면 8월 11일까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할 수 있다. 짐도 가지고 걸었는데, 짐 없다면 가뿐하겠지! 벌써 두 번째 계획 변경이다. 처음 계획 변경은 원래 계획보다 내가 너무 못 걸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번에는 그것보다 더 잘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여행 계획이라는 게 다 그렇다고 생각하며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도 즐기고 있었다. 나의 컨디션에 맞게, 상황을 봐가면서.

이전 01화 순례길 열여덟 번째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