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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l 28. 2023

순례길 스무 번째 이야기

기부제 알베르게

구간 : 모라티노스 - 엘 부르고 라네로
거리 : 27.3KM
소요 시간 : 8시간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알베르게'(Albergue)라고 부른다. 오래전부터 큰 도시를 제외한 다른 중소 마을에서는 알베르게가 순례자들의 잠자리를 담당했지만, 관광 산업이 발전하면서 알베르게뿐 아니라 호스텔, 호텔, 아파트먼트, 비앤비 등 많은 종류의 숙소가 등장했다. 그래도 저렴한 가격과 순례길에 대한 추억 때문에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숙박 형태는 역시 알베르게이다. 알베르게는 대부분 도미토리 형식으로 되어있으며 간혹 개인실을 원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소수의 방을 준비해놓기도 한다. 알베르게는 공립과 사립으로 나뉘는데 공립 알베르게는 지방자치단체나 종교시설에서 운영하기도 하며 예약이 불가한 대신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사립 알베르게는 대부분 예약이 가능하고 시설이 더 좋은 대신 가격이 조금 더 비싸다. 정말 간혹 마을이나 종교시설에서 운영하는 기부제 알베르게를 만날 수도 있다. 순례자들은 자신의 성향에 맞게 숙소를 선택하면서 순례길을 걷는다.



  나는 이틀에 걸쳐 레온이라는 큰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문제는 이틀 동안 거리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였다. 모라티노스에서 레온까지의 거리는 총 64KM 정도. 첫째 날 27KM를 걷고 둘째 날 37KM를 걸을 것인지, 아니면 40KM를 먼저 걸은 다음 27KM를 걸을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또 깜빡하고 동키 서비스를 예약하지 않은 탓에 첫째 날에는 27KM만 걷기로 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오늘의 목적지는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였다. 까미노 닌자 앱에서 검색해 본 결과 이곳에는 기부제 알베르게가 있었다. 앱에 나온 알베르게는 총 2개였는데, 그중 한 곳의 평점이 말도 안 되게 낮았기 때문에 기부제 알베르게를 이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대부분의 기부제 알베르게는 평점이 높았으므로 오늘 묵을 알베르게의 평점 8.2점은 결코 높은 것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도착해 보니 애플리케이션에 나오지 않는 몇 개의 알베르게가 더 있었다.)



  어제 30KM를 걸어서 그런지 오늘 걷는 27KM는 비교적 수월했다. 다행히도 그늘이 있었고 풍경이 예뻤기 때문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금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을에 도착한 순간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지붕이 나무로 된 집이었는데, 지붕 앞면에 있는 벌어진 틈새 사이로 비둘기가 들락날락하는 것이었다. 사람 사는 집에 비둘기가 자유롭게 드나드는 친환경 하우스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알베르게의 상태를 확인해보고자 했다. 그런데 이곳 역시 지붕은 나무로 되어있었고 벽면은 흙과 짚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알베르게의 천장


  기부제 알베르게이다 보니 직원들은 굉장히 친절했다. 기부제 알베르게를 처음 이용해 보는 내게 어떻게 이용하면 되는지 정성스레 설명해 주었다. 돈을 내는 것은 절대 강요가 아니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 본인이 내고 싶은 만큼만 내라는 것이었다. 대략적인 알베르게 운영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난 후 주방과 화장실, 세탁하는 장소를 보여주었다. 기부제 치고는 시설이 괜찮다고 생각하고 다른 공립 알베르게와 마찬가지로 10유로를 기부하였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서 침실을 볼 수 있었다. 직원은 침대의 1층과 2층 중 한 곳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장을 본 순간 나는 천장에서 배드버그뿐 아니라 쥐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순례길의 감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잘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몰려왔다. 2층을 쓴다면 정말 자고 있을 때 뭔가가 떨어질 것 같아서 1층을 사용한다고 했다.


  침대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내 몸을 매트리스가 착 감는 기분이 들었고, 나쁘게 말하면 심하게 푹 꺼져서 마치 트램펄린 위에서 자는 기분이었다. 10유로를 낸 것을 후회했다. 아니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했지만 아닌 척했다. 2유로만 덜 낼걸. 아니다. 많이 기부한 사람이 있으면 그걸 가지고 다음 순례자들을 위해서 시설 개선에 사용할 것이라고 위로했다. 그래도 샤워부스가 많은 것은 좋았다. 머무는 사람의 수만큼 샤워 부스가 있는 수준이었다.


마을에서 파는 라면 완전 맛있습니다


  많은 기부제 알베르게들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적어도 5유로 이상을 내며 숙박하지만, 적지 않은 순례자들이 기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적극 활용하여 한 푼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기부제이기 때문에 기부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곳의 시설을 마주한다면 기부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하루를 머무르며 안전하게 잠을 자고, 깨끗하게 씻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받는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는 치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이곳이 계속 유지되고 이후에 올 순례자들에게 우리가 받았던 안락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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