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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l 30. 2023

순례길 스물두 번째 이야기

남은 거리가 줄어드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구간 : 레온 -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
거리 : 32.1KM
소요 시간 : 8시간 30분


  문제가 생겼다. 레온에서 이틀을 머물렀고, 두 번째 날 아파트먼트를 예약해서 지냈다. 동키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하니 내 숙소가 도시 외곽에 있는 터라 가지러 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짐을 보내려면 도시 중심부의 다른 알베르게에 맡기든지, 동키서비스가 짐을 직접 가지러 오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레온에서 하루를 쉬어서 그런지 발 상태가 더 안 좋았다. 두 번째 날 밤에는 자는 내내 계속 종아리에 쥐가 나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발에 잡힌 물집들은 괜찮아지긴 했지만 근육들이 여기저기서 소리를 질러댔다. 하루 쉬면 더 나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긴장이 풀려 피로가 몰려온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에 조금 늦게 출발하더라도 푹 쉰 다음에 좋은 컨디션으로 걷는 것이 나아 보였다. 



  8시에 짐을 챙겨 나갔다.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이른 시간이라 공기는 차갑긴 해도 스페인의 햇볕은 뜨거웠다. 늦게 출발하는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레온으로 오는데 8시간이 걸렸으니 오늘은 그보다 거리가 짧으므로 더 적은 시간이 소요되리라 기대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37~8도를 웃도는 날씨가 지속될 예정이므로 한 시간이라도 빨리 도착해야 했다.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걸었던 날들을 생각하면, 걷는 도중 당장 지치는 것보다 도착하고 나서 오는 후폭풍이 더 셌기 때문에 컨디션 조절을 위해 빨리 숙소에 들어가는 것이 필수였다. 더군다나 새벽에는 대학원 입학 면접이 예정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오후 4시 30분이 넘은 뒤에야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고 기온이 높다 보니 자주 물을 마셔줘야 했다. 이 정도의 더위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물을 충분히 챙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바에 자주 들러서 콜라나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걷는 흐름이 끊기다 보니 영 속력이 나지 않았다. 늦어지는 발걸음은 뙤약볕에서 더 오래 걷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처럼 오후 2~3시에 가장 덥고, 4시가 지나면서 더위가 조금 가라앉으면 좋겠지만, 이곳은 3~4시에 가장 기온이 높고 그 온도가 몇 시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것이 내가 적어도 오후 2시까지 숙소에 들어가려는 이유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더위 속에서 걷고 있는 사이, 길을 안내하는 비석이 나왔다. 301.8KM. 벌써 이렇게나 많이 걸었나? 그리고 나타나는 294KM와 280.6KM. 이전까지는 비석의 거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비석이 몇 KM를 보여주든 아직 남은 날짜를 셀만큼 목적지가 가깝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새 300KM대를 지나 200KM대로 접어들었고, "이렇게 많이 걸었나?"라는 질문은 "벌써 이 정도밖에 남지 않았나?"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기분이 묘했다. 거의 800KM 가까이 되는 거리 중 어느새 이만큼이나 왔다니. 하루에 30KM가량을 걸어왔으니 3~4일이면 앞자리가 바뀌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레온을 통과하고 나서는 순례길의 후반부에 접어든다고 하니 이제는 점점 순례길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던 것이었다. 앞자리가 2로 바뀌고 나서는 계산이 쉬워졌다. 하루에 30KM를 걸었을 때 이 길이 끝나는 날짜. 오늘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300KM의 마지막 표지판을 보았으니 오늘부터 적어도 11일 이내에 까미노는 끝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 벌써 이 길을 3주 넘게 걷고 있었구나.


  아쉬움이었을까. 처음에는 이 길을 다 걸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한 달이 넘게 걸릴 것이라는 시간은 너무 까마득해 보여서 세는 것이 의미가 없어 보였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고, 버스를 타고 점프를 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물집은 부위별로 돌아가며 잡혔고, 물집이 터지고 난 자리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물집이 고개를 내밀었다. 발목과 발바닥은 순례길을 걷기 전부터 고질적인 문제였으므로 아픈 것이 기본이었고, 어제저녁에는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말썽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길을 걸으며 오는 고통이 익숙해지지 않으니 걷고 있는 순간도 늘 새로웠다. 멈추었다가 다시 걷는다면 무던해졌던 통증이 한 번에 밀려왔기 때문에 쉬지 않고 걷긴 했어도, 아무 의식 없이 발이 가는 대로 나를 맡겼던 순간은 드물었다. 아픈 순간순간마다 내 정신은 항상 깨어있어 주변 것들을 살폈거나, 아프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잡고 무작정 걸었던 순간뿐이었다.


  이렇게 걷는다면 10일, 다음 주면 끝나는 길이다. 오늘이 월요일이니 다음 주 목요일, 늦어도 금요일에는 끝날 길이다. 끝나는 날이 눈에 보였다. 어쩌면 이 생각이 더위 속을 걸었던 오늘의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을까.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드디어 끝이 보이고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들었기 때문이다. 끝나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다음 주에 끝날 길이었지만 10일이 지난 이후에도 계속 걷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끝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내 앞에 있는 저 숫자들이 줄어드는 것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하루를 시작하며 마주치는 숫자와, 하루를 끝내며 보는 숫자의 차이가 너무 크고 빨리 작아지는 것이 먹먹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생각이 아쉽다는 생각과 무엇이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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