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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l 29. 2023

순례길 스물한 번째 이야기

음악과 함께하는 메세타

구간 : 엘 부르고 라네로 - 레온
거리 : 37.5KM
소요 시간 : 8시간


  대도시인 레온까지의 거리가 애매하게 남았다. 남은 거리는 37.4KM. 하루 안에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였고 이틀에 나눠서 가기에는 조금 짧았다. 하루에 30KM씩 걷기로 결심했는데 37KM가 넘는 거리라니.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면 괜찮겠지 하며 한 번에 가기로 했다. 예상 소요시간은 8시간. 요즘 내가 걷는 속도라면 1시간에 5~6KM를 갈 수 있지만 중간에 휴식이 필요했고, 오랜 시간 걷다 보면 속력이 느려지기도 하므로 8시간을 목표로 했다. 나의 계획은 새벽 5시에 출발해서 오후 1시에 도착하는 것. 내 마지막이 될 기부제 알베르게를 뒤로 하고 길을 나섰다.



  너무 일찍 출발해서였을까. 길이 너무나도 어두웠다. 한국에서 챙겨 온 헤드랜턴을 동키 서비스로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오랜 시간 걸어야 하기 때문에 핸드폰 배터리도 신경 써야 해서 플래시를 켜는 것도 자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어둠 속을 몇 시간 걷다 보니 점점 날이 밝아왔다. 그렇게 내 앞에 있는 것들이 자신의 형체와 색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신기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걸어온 길은 여름이었고, 걸어갈 길은 가을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걸어 계절의 변화를 만나게 된 느낌이었다. 오랜 시간을 걸었지만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걷고 또 걸었다. 또 걷고 계속 걸어도 레온까지는 한참 남았다. 37.4KM는 너무 길었다. 이전까지의 메세타와는 달리 중간중간에 마을이 나오고, 숲도 나오는 등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었지만 지친 몸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만약 어제의 내가 나를 과신하여 오전 6시나 7시에 나가기로 결정했다면 더위까지 더해져 최악이었을 것 같았다. 혹시나 하고 챙겨 온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고 핸드폰에 연결했다. 한국에서는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쓰기 때문에 음악을 듣거나 무대 영상을 보는 것이 부담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데이터를 제한적으로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음악 감상을 잠시 미뤄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분 전환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었기에 음악이 내 앞의 풍경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어줄 것을 기대하며 음악을 틀었다.



  음악의 효과는 대단했다. 마치 뮤직비디오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나 할까. 리드미컬한 음악을 들을 때는 등산 스틱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힙합 음악의 베이스 소리가 등산 스틱의 소리와 생각보다 잘 맞았다. 걸음은 빨라졌지만 호흡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힙합 음악을 한참 듣다 보니 마을이 나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출발할 때는 다른 장르를 틀었다. 이 길에 발라드가 어울릴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노래를 틀었다. 그러자 주변 풍경 속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눈앞에 펼쳐진 것들이 아까와는 달리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인 정승환의 '눈사람'이라는 곡이 새로운 경험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가수 아이유가 작사와 작곡을 한 눈사람은 예쁜 가사와 그에 어울리는 슬픈 멜로디가 일품인 곡이다. 거기에 정승환의 목소리가 가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나는 가장 좋아하는 정승환의 노래 중 하나로 꼽는다. 이 곡을 들으면서 발걸음을 늦췄다. 그랬더니 내가 흙을 밟고 가는 발소리가 마치 정승환의 가사처럼 눈을 밟고 걷는 소리처럼 들렸다. 기존에 사용하던 에어팟이 아니라 줄이어폰을 사용했기에 적당히 바깥소리가 들어온 탓이었다. 



  그리고 곡의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끝나가듯 레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곡의 마무리에 웅장한 사운드가 잔감정을 잡아주듯 레온은 이전의 도시와는 다른 거대함으로 오늘의 대장정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넓은 품으로 맞아주었다. 만약 순례길에서 음악을 듣는다면 노이즈 캔슬링으로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줄 이어폰을 통해 바깥소리와 상호작용 하는 것을 추천한다.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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