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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Aug 15. 2023

순례길 스물세 번째 이야기

빨리 가며 놓치는 것들

구간 : 오스비달 데 오르비고 - 엘 간소
거리 : 30.7KM
소요 시간 : 8시간


  내가 노트북을 챙겨 온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순례길 여정 중에 있을 박사과정 입학. 이 여행을 계획하고, 한국을 떠나오는 날까지 대학원 추가 모집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나는 꼼짝없이 길을 걷는 중에 대학원 원서 접수와 면접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웬걸. 내가 가지고 있는 맥북으로는 대학원 원서 접수가 불가했다. 유웨이 어플라이 시스템이 맥북을 지원하지 않는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오랜만에 동생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다.(한 살 차이 나는 여동생에게는 연락할 일이 거의 없다.) 입학에 필요한 서류들을 동생에게 보냈고, 동생이 원서를 접수해 주었다. 그리고 한국 시간 오전 10시 30분으로 면접 시간이 결정되었다. 동대학원으로의 진학이었고, 학과 조교까지 했기 때문에 굳이 면접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지만, 혹시 기계적 문제로 면접에 차질을 빚을까 하여 노트북 세팅을 점검하고 충전까지 완료했다. 그렇지만 인터넷 연결 등의 문제로 결국 스마트폰으로 면접을 치르게 되었다. 내가 굳이 이 무거운 노트북을 순례길에 가지고 오게 된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면접은 무사히 끝났다. 새벽에 깨어 비몽사몽 한 탓에 횡설수설했지만 준비했던 말은 모두 했던 것 같다. 문제는 새벽에 일어나 긴장한 상태에서 면접을 진행했기 때문에 다시 잠들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결국 늦잠을 자게 된 것이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오전 8시 이후에 출발하게 되었다. 혹시나 늦게 일어나 걸을 것을 대비해 동키 서비스를 보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지만, 이 안일한 마음이 문제를 야기했다.



  오늘도 역시 해가 밝게 떠 있을 때  걷는 것을 시작했다. 오늘 가기로 한 목적지는 엘 간소(El Ganso)였고, 주요 거점 도시인 아스토르가(Astorga)를 지나야 했다.


미처 물을 사지 못해 헐떡이다 만난 오아시스


  나는 대도시인 레온을 지나기까지 보통 사람들이 걷는 거리보다 하루에 몇 킬로씩을 더 걸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온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레온에서 하루를 쉬면서 같이 출발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까미노 초반부터 함께 했던 여러 외국인 친구들, 한국 팀들, 그리고 잭과 지미를 만났다. 특히 잭은 아스토르가에 거의 도착하여 만날 수 있었는데, 쉬지 않고 달려온 자기보다 어떻게 먼저 갈 수 있냐고 물어왔다. 잭은 아스토르가에서 머물 예정이었는데, 대부분의 가이드북이 아스토르가를 거점지역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잭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 도시에서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보다 더 먼 마을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더 빨리 아스토르가에 도착했다. 그저 지나가는 마을 중 하나였던 아스토르가는 가우디의 건물이 있는 크고 중요한 도시였다. 도시를 빠져나가는 데까지 많은 관광객들과 순례자들, 그리고 관광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이드에서 정한 거점 도시를 찬찬히 살펴보지 않은 채 지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이전에도 거점 도시에 머물면서 특별한 관광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까미노 루트에 맞게 길을 지나왔을 뿐이었고, 그 길에 볼거리가 있다면 잠시 감상하고 지나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선택에 의해 이 도시를 그저 지나쳐야 했다. 물론 천천히 살펴보고 갈 시간 정도야 있겠다마는, 이 도시를 빠져나가 걸어야 할 오르막에 대한 걱정이 그 생각을 빼앗았다. 나는 이 도시를 충분히 즐기지 못한 채 지나쳐야 했다. 아쉬움도 잠시였다. 그늘 한 점 없는 오르막을 걸어가며 한 시라도 빨리 걸어온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서둘러서 온 결과 나는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갔다. 짐을 풀고 오늘 입었던 옷을 세탁했다. 빨래를 널고 시원한 물을 마시며 잠깐의 여유가 찾아왔다. 그제야 내가 빨리 가며 놓친 것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목표 마을까지 얼른 도착하고자 지나왔던 아스토르가의 아름다움이었다. 그곳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올 만큼 다양한 색채를 지니고 있는 마을이었다. 도시에는 가이드 오디오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설명이 필요한 건축물들이 많았고, 맛있는 음식들과 커다란 쇼핑몰이 있었다. 내가 아스토르가에 묵기로 결정했다면 오후 중 많은 시간을 이 도시가 보여주는 의미들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빨리 가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마을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다.


  또 그것은 함께 했던 친구들이었다. 까미노에서 만났던 친구들은 대부분 어플이나 가이드북이 제시하는 루트대로 걸었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들을 앞서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의 가이드는 하루에 25KM 이상을 추천하지 않았고, 나는 30KM 이상을 걷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앞질러 온 이상 그들과 더 이상 만나기 힘들었다. 그들은 여전히 가이드대로 걸을 것이고, 나는 내 목표대로 걸을 것이므로 점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첫 번째 이유보다도 두 번째 이유가 더 크게 다가왔다. 레온에서 만난 누군가가 나에게 "메세타를 함께 걸었던 사람들이 진짜 까미노의 가족이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구간을 회상해 보니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까미노의 '친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메세타 구간을 지나며 많은 대화를 나눴던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함께하는 처음 구간보다, 그중 대다수가 건너뛰고 남은 몇몇이 모여 이제야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서로에 대해 궁금해하는 구간이 메세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레온을 지나며 함께 걷는 이들은 메세타를 함께 건너왔던 일행인 경우가 많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원했던 나는 이제 자의든 타의든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목적을 위해 그들을 앞질러왔다. 그렇지만 까미노를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기억을 그리워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단순히 그 사람들을 앞질러 온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과 더 깊이 있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뒤로한 채 걸어온 것 같았다. 물론 내일의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테지만, 정들었던 이들과의 이별은 내 계획에는 없었다.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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