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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Aug 17. 2023

순례길 스물네 번째 이야기

가장 높은 곳의 십자가

구간 : 엘 간소 - 모리나세카
거리 : 31.5KM
소요 시간 : 7시간


  까미노 첫째 날 피레네 산맥을 겨우 넘고 나서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 구간이 가장 힘들다고 했기 때문에 남은 일정들은 이것보다는 편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 분께서 까미노에는 세 개의 한라산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한라산을 온전히 오르는 만큼의 높이라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는 처음에 넘은 피레네 산맥이고 남은 두 개는 레온을 지난 후에야 만날 수 있다고 하셨다. 각각의 산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야 모두 다르고 각기 아름답겠지만, 한국인에게 적합한 설명을 위해 한라산을 세 번 오르내려야 까미노를 완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레온 이후 만나는 길은 까미노의 후반부이기 때문에 첫날 들었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힘들었다는 말이다.


엘 간소에서 출발해 처음으로 만난 라바날. 이 마을에는 많은 이벤트가 있다.


  엘 간소까지 30KM를 걸었던 나는 다음 날의 일정도 30KM 이상으로 계획했다. 어플이 제시하는 대로라면 내가 마주한 산을 이틀에 걸쳐서 넘게 된다. 그렇지만 30KM씩 걷기로 계획했던 나는 산의 초입인 엘 간소에서 하루를 묵었고, 쉼 없이 하루 만에 이 산을 통째로 넘어야 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두 번에 걸쳐서 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고, 한 번에 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만 이 날 오후에 까미노를 걸으면서 처음으로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산의 고도는 1512M로 그렇게 오르기 어려운 산은 아니었다. 다만 그늘이 없고 벌레가 많이 달라붙어 짜증이 날 뿐이었다.


  오르막은 앞서 언급한 불편함을 제외한다면 수월했다. 문제는 내리막이었다. 그늘 없이 완만했던 오르막과는 달리 내리막은 경사가 심했다. 뿐만 아니라 돌길로 되어있거나 바위로 된 길이어서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닌 덕에 길이 잘 나있었지만, 돌의 미끄러운 것까지는 어찌하지 못한 것 같았다. 몇 킬로를 조심조심 내려오다가 마지막에는 뛰어내려와야 할 정도로 길이 험했다. 아침 일찍 출발했다면 해가 뜨기 전 길이 보이지 않아 굉장히 위험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 길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해발 1495M 부근에 있는 십자가 때문이다. 까미노에 있는 수많은 십자가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고 하는 이 십자가는 특별히 '철의 십자가'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여기에는 한 가지 풍습이 있는데, 철의 십자가를 지나는 순례자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십자가 주변에 쌓아두는 것이다. 이것은 산티아고 대성당을 지을 때 순례자들이 직접 돌을 하나씩 가져왔던 전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대성당이 다 지어지고 나서 많은 순례자들은 고향에서 가져온 돌에 염원하는 바를 적어서 십자가 아래 두거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거기에 두고 다시 길을 떠난다. 



  순례자들은 철의 십자가를 지나면서 까미노의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그동안 까미노에서 얻은 것과 얻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버려온 것과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철의 십자가 다음에 펼쳐지는 힘든 내리막을 걸으면서 자신이 정리한 생각들을 곱씹고 그 의미를 극한까지 밀어붙이게 된다. 


  순례자들은 그 기나긴 길을 자신의 염원과 함께 걷는다. 자신이 고향에서 가져온 소망에 담긴 돌을 순례의 고난, 고민과 함께 철의 십자가까지 짊어지고서 높은 산을 넘고, 지루한 평야를 한참이나 걸어 많은 것을 깨달은 후에야 철의 십자가에 다다르게 된다. 이제는 이 길이 당신의 염원을 당신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바라준다고 헤아려 줄 때야 그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비워야 하는 까미노에서 여기까지 기어코 가져온, 그럼에도 끝까지 바라야 했던 소망들이 적힌 돌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이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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