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별 Aug 21. 2023

순례길 스물여섯 번째 이야기

배드 버그와의 사투

구간 : 비야프란카 델 비에르조 - 라스 에리라스
거리 : 20.4KM
소요 시간 : 6시간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총 20.4KM였다. 하루에 30킬로미터 이상 걸으려 했지만, 이 마을을 지나친다면 산 하나를 꼬박 넘어야 하기 때문에 두 번에 나눠서 걷기로 결정했다. 산 하나를 넘는 것에 대한 위험은 이미 경험한 터였다. 평소의 3분의 2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평균적으로 1킬로미터를 10~11분 사이에 걸을 수 있었으니 한 시간에 5~6킬로미터를 걷는 셈이었다. 따라서 네 시간이면 오늘의 일정은 금방 마무리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 7시 정도가 되었을 때 일어나서 다른 순례자들을 다 떠나보낸 후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난 알베르게에서 여유롭게 샤워를 하고 내려가 가방을 챙겼다.

 

  그런데 등 쪽에서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등을 만져보니 벌레에 물린 것처럼 부어있었다.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강타했다. 마침 한국인 순례자가 내려왔다. 내 등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왼쪽 등에 벌레 물린 자국이 일렬로 줄지어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손과 복부에도 벌레에 물려 빨갛게 부어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한국인 순례자도 벌레에 물린 자국이 있었다. 누가 봐도 배드 버그였다. 세상에 배드 버그라니. 특히 이 숙소는 깔끔한 시설 덕분에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평점이 매겨진 곳이었다. 물론 바닥이 나무로 되어있어서 불안하긴 했지만, 이곳을 지나다닌 수많은 사람들의 후기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큰 충격이었다.


  유럽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배드 버그에 대한 글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배드 버그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안심했다. 그저 풀숲에서 아무렇지 않게 앉아서 쉬고, 잘 씻지 않는 비위생적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히 많은 여행 가운데 배드 버그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과 같은 숙소를 쓰고, 같은 침대를 공유하기 때문에 나 혼자 깔끔하게 지낸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분명히 어제저녁부터 오늘 아침 사이에 물렸을 텐데, 이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벌레에 물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온몸이 간지럽고 벌레가 지나다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출발하면서 본 비야프란카


  걷는 내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몸 한 군데가 갑자기 따갑거나 간지러우면 혹시 새로 배드 버그에 물린 것이 아닌지 살펴보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걷는 속도가 계속 느려졌다. 조금 걷다 몸을 살펴보고, 또다시 걷다가 몸을 살폈다. 한 시간 동안 3킬로미터를 채 가지 못했다. 안 그래도 늦게 출발해서 해가 중천이었는데, 계속 걸음이 더뎌지니 날씨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계획으로는 12시 안으로 도착해야 했지만, 12시가 되었을 때 겨우 절반 정도를 걸었을 뿐이었다. 중간에 있는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약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계속 간지럽고 새로 올라오는 것이 생겼다. 겨우겨우 간지러움을 참고 약국에 방문했다. 내 손과 몸에 벌레 물린 자국을 보여줬다. 배드 버그 때문에 약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약사에게 증상을 보여주면 그에 맞는 처방을 해준다고 전해 들었다. 배드 버그도 종류가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처방을 받아서 약을 바르거나, 바르는 약과 먹는 약을 병행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배드 버그를 접하기 전까지는 이것에 대해 아무런 계획이나 대비책을 세워두지 않았는데, 막상 배드 버그에 물리고 나니 당황스러웠다. 이전에 만났던 한국인들이 비오킬과 같은 것들을 굳이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면 되지, 굳이 무겁게 왜 들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내 상황이 급하다 보니 그들의 준비성이 대단해 보였다.


목적지로 가는 길


  약사는 나에게 바르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 내가 봤던 배드 버그 약이 아니었지만, 나는 충분히 내 증상을 설명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약국에서 나와 바로 약을 발랐다.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 벌써부터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모든 옷과 가방, 신발을 세탁하고 모든 짐을 햇빛 아래서 일광소독을 진행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모든 짐들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닦았다. 중요한 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침대에서 멀리 떨어뜨려 두었다. 그렇지만 배드 버그 시체를 눈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라스 에리라스


  다행히 하룻밤이 지나도 더 물린 자국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간지러운 부분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었다. 약을 계속 바르고, 또 계속 긁고 있으니 다른 한국인 순례자가 자신이 처방받은 약을 건네주었다. 내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 약을 바르고 하루가 지나니 점차 부었던 부분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가 받았던 약에 비해 효과가 눈에 띄었다. 맞는 약을 이런 식으로라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배드 버그에 물렸다는 것은 단순히 간지러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온몸 구석구석에 계속 신경 쓸 수밖에 없었으므로 편히 걸을 수가 없었다. 물린 곳이 더 생기지 않았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더 문제는 더 이상 이곳에서의 잠자리가 편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에게 약을 나눠주었던 분은 배드 버그에 물린 부분이 너무 많이 부어오르고 염증도 생겨서 큰 도시에서 병원을 방문했고, 며칠을 쉬어야 했다. 


  할 수 있는 만큼 대비할 것. 그리고 약을 처방받았음에도 증상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또다시 병원이나 약국을 방문할 것. 

이전 08화 순례길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