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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Sep 16. 2023

순례길 서른한 번째 이야기

어차피 미치려고 온 길이다

구간 : 보엔떼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거리 : 48KM
시간 : 8시간 40분


48.1KM를 한 번에 가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 이유는 이 구간을 두 번으로 나누기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최소 30KM를 걷는 것으로 정했는데, 보엔떼로부터 20KM 이후 마을들에 있는 모든 알베르게에 예약이 모두 찼다. 그렇다고 다음날 13KM를 걷고 마지막 날 35KM를 가는 것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금까지 걷는 동안 죽을 만큼 힘들었던 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한 처음 목적은 내가 가진 생각의 프레임을 깨뜨리기 위함이었다. 물론 논문이 통과되면서 목표 의식이 희미해졌지만, 조금 더 합리적이고, 조금 더 단단한 시각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나는 나를 극한으로 몰아넣고, 그 상황에서 생각이 전환되는 순간을 발생시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길에서 만나게 된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재료 삼아 내가 가진 생각의 틀을 녹여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습관적 생각을 넘어서는 고민의 시간, 그리고 기존의 것들을 철저하게 붕괴시킬 진통이 필요했다. 당연한 생각으로 내 고통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생각도 사라지고 모든 것을 다시 세울 진통이 필요했다. 이제 내 앞에는 48KM의 길밖에 없었고 내 목표를 이루어내야 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젯밤 잠에 들기 전 마지막 채비를 했다. 한 번도 걸어보지 않았던 거리였기 때문에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았다. 순례길에서 사용했던 많은 물건들을 버렸다. 몸의 근육들을 충분히 풀어주고, 잠을 푹 잘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갑작스레 다가온 순례길의 마지막 날에 대한 설렘과 아쉬움 때문에 잠을 푹 잘 수 없었다. 

 

  새벽 3시 50분에 일어났다. 다른 순례자들은 여전히 밤의 날개 아래서 쉬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자는 이 시간이 순례자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지난 한 달의 여행동안 경험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히 준비했다. 배낭에 남아있던 라면 몇 개를 숙소에 같이 있던 한국인 동생 가방 옆에 두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4시 10분이 되어서 숙소를 빠져나왔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나온 데다가 잠까지 설쳤기 때문에 몸이 풀어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물론 졸면서 걷는 것은 이제 충분히 익숙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빛이 하나도 없을뿐더러 나를 지나가는 순례자도, 내가 지나친 순례자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긴장 속에서 걸었다. 아빠의 강력한 권고로 가져온 헤드랜턴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내 앞에 펼쳐진 길, 아니 길인지 숲인지 구분할 수 없었던 막연한 어둠 속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어떠한 빛도 없었다. 감도 잡히지 않는 남은 거리와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나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걸어야 했다.



  어둠 속을 그렇게 걷다 보니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점점 주변의 것들이 자신의 형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나무가 보이고, 길이 보이고, 강이 보였다. 길 위의 것들은 몇 시간의 완연한 어둠을 견뎌내고 다시 한번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순례자로서 나를 나타낼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나를 좌절시키려는 순간들이 있었다. 패기 있게 48KM를 시작하였으나, 3분의 1을 걷고 나서도 보통날 걷는 순례길의 거리만큼이 남아있었다. 나는 매일 걸어야 할 길을 3등분 하여 걸었는데, 보통의 경우 이때마다 앞자리 숫자가 바뀌기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걸어온 길, 걸어가야 할 길이 대략적으로나마 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3분의 1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거리가 주는 희망이 전혀 없었다. 점점 현실과 타협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시간이 꽤 지났다. 절반을 넘게 걸었고, 숲길도 여러 번 지났다. 위기의 순간은 단순히 시간이나 거리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야트막한 산이 어찌나 많던지 힘든 몸을 이끌고 오르막과 내리막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절망적인 순간을 주는 것은 체력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점점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이제는 눈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보일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저 산만 넘으면 산티아고가 보이겠지'라는 희망이 번번이 좌절되었다. 힘겹게 산을 넘어도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또 다른 산이었다.


  3분의 2를 지날 때쯤 다리가 슬슬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발걸음을 옮긴 탓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이건 미친 짓이다'라는 생각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체력적으로 힘든 데다가 정신까지 갉아먹힐 기세였다. 그런 생각을 어서 잠재워야 했다. 어떤 방식으로 잠재워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계속된 끝에 나온 답은 '어차피 미치려고 시작한 길이잖아'였다.


  정상적으로 만나는 육체적 환경과 정신적 상황에서는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니 나는 마지막에서야 미친 짓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아무런 준비 없이 780KM나 되는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 남들보다 체력이 좋지 않은 데다가 최근 몇 년간은 운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책상에만 앉아 있던 내가, 이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도 선택했다. 무작적 이 길에 도착하면 어쩔 수 없이 몸이 움직일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어차피 미치려고 온 길'이라는 생각을 애써 상기시키자 스스로를 좌절시키려던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걷는 것 외에는 어떠한 생각과 걱정도 머릿속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0KM가 남았다는 표지석을 만났다. 정밀이지 이 무렵부터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심지어 준비했던 물이 다 떨어졌고, 물이나 음료수를 사 먹을 수 있는 곳도 나타나지 않았다. 걷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오전에 최대한 빨리 걸었을 때는 1KM를 8분 50초에 돌파했었는데, 같은 거리를 걷는 시간이 20분에 가까워졌다. 앉아서 쉬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쉬는 시간보다 조금이라도 더 걸어서 마실 것을 찾아야겠다는 목표가 훨씬 강했다. 그리고 겨우 음식을 파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앉아서 마시는 콜라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비록 햄버거가 너무 퍽퍽해서 전부를 먹을 수 없었지만, 눈앞에 마실 것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출발해야 하는데, 한 번 앉아서 쉬어버린 몸과 가야 한다는 머리가 계속 다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의 경우 이 정도 걸었으면 몸은 쉴 때가 되었다고 주장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포기하더라도 묵을 숙소가 없으니 더 몸이 느슨해지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결국 몸을 일으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 번 풀린 다리를 다시 부여잡았다. 앉아서 쉬기 전보다 다리의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았다. 겨우 한 걸음씩 떼고 있던 그때, 정말 산티아고라는 대도시에 다다랐음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멀리서 제법 큰 마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는 넓어졌고, 집을 비롯한 건물들은 점점 빽빽해졌다. 이제는 정말 끝에 도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산티아고라는 도시로 접어드는 것도 모른 채 도시로 입장했다. 어느 순간 표지석은 보이지 않았고, 지난 몇 주 동안 목표했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직접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였다. 이 표지판을 따라 도시를 헤맸다. 그렇게 따라가니 낮은 건물들 사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모습이 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리 걸어도 커지지 않는 십자가를 보며 기어코 걸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대성당의 자태가 내 감정을 짓눌렀다.



  그렇게 장장 48KM를 걸었다. 8시간 40분을 걸어 도착했다. 눈앞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펼쳐졌다.



  셀 수 없이 많은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길 위에서 들었던 생각들, 길 위에서 발생한 사건들. 내일도 더 걸어야 할 것 같은데, 이제는 걸을 길이 남아있지 않았다. 도착해서도 나는 여전히 내일 걸을 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난 한 달간을 걸어왔을까. 뚜렷한 종교관도, 목적의식도 없던 내가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걸어왔을까. 많은 사람들이 느낀 만큼 나는 이 길을 충분히 안아봤을까. 아니 오히려 이 길에 나를 충분히 녹여냈을까.


  순례자 사무소에 가서 완주증을 받고, 나를 응원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내 순례 여정이 끝났다는 것을 입으로 뱉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드디어 780KM 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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