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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Apr 30. 2023

순례길 여행기의 시작

여행을 결심하다

  7월 9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8월 17일 파리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미뤄두었던 해외여행을 다시 시작했다.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비행기를 탔던 나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2년 동안 해오던 대학교 조교 일이 끝나면서 얼마 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고, 퇴직 급여가 통장에 꽂혔다. 이런 상황들은 내가 여행을 갈 수 있던 환경적인 조건들이었을 뿐, 내가 1년 반만의 여행을 결심한 계기는 다른 곳에 있었다.


  조교 생활 동안 미뤄왔던 석사 학위 논문 작성을 시작했다. 이미 2021년 12월에 논문의 주제와 전반적인 개요를 구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포절 발표를 완료했다. 첫 목표는 학위 논문 심사 신청기간인 4월 말까지 논문 초안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2월 말 퇴사를 하고, 3월부터 5월 초까지 영어로 된 원서들에 둘러 쌓여 논문을 써 내려갔다. 계획대로 초안을 완성하여 논문 심사를 신청했으나, 지도 교수님의 첫 피드백은 "다음 학기로 넘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원 수업을 2년 가까이 수강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동안 장문의 글을 써본 경험을 해본 것도 아니었으므로 조교 생활이 끝나면 뚝딱 논문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던 내 생각은 오만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주제가 참신하고 뒷받침할 내용이 확실하던가, 아니면 이에 대한 부족함을 채워 줄 글솜씨가 뛰어나야 했지만, 나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교수님은 내가 수업에서 보여줬던 글 쓰는 방식에 대해 기대했으므로, 처음 보여드린 논문에 대해 실망했고 주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책을 더 읽고, 논문을 더 찾아보면서 공부할 테니 제발 주제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수백 번 생각하고 교수님을 찾아갔으나, 교수님의 첫마디는 나를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물론 포기하지 않고 다시 3주 간 내 논문을 다시 구성하려는 노력을 다했지만, 한편으로는 교수님의 피드백이 너무 광범위하면서도 명확했기 때문에 교수님 말씀대로 더 준비해서 다음 학기에 심사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으로 수정을 하여 교수님을 다시 찾아갔으나, 다음 피드백에서도 교수님은 확실한 답을 주시지 않았다. 심사 가능한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으므로 거의 포기한 상태에 이르렀다.


  논문 발표를 다음 학기로 미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논문의 주제부터 구성까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결심했다. 몇 개월 동안 하나의 주제로 끊임없이 생각을 해오다 보니 내가 정한 주제와 구성에 스스로가 갇혀버려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아무리 고민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봐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몇 번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틀 안에 갇혀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원점만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이 틀을 깨어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결정하고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했다. 이를 방해하는 것은 손목의 통증이 보여주는 몇 달간의 지독한 노력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새로운 것을 가지고 다시 시작한다면 그동안 내가 보인 문제점이 해결될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보다 다른 주제를 가지고 새로 시작했을 때 나는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틀과 그 안의 내용들은 일단 가지고 있되, 새로운 환경에서 그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식을 택했다. 모든 생각과 말, 행동이 습관처럼 한 지점으로 회귀할 때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바꾸고 새로운 눈으로 나에게 익숙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 필요했다.


  떠나자. 내가 만든 환경에서 벗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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