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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Apr 30. 2023

순례길 여행기 0번째 이야기(2)

왜 산티아고 순례길인가(2)

  2017년 모로코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한국인 친구를 만났다. 당시 나는 파리에서 시작해 바르셀로나를 거쳐 모로코 마라케시로 이동했다. 모로코 여행의 목적 중 하나인 사막 투어를 위해서는 마라케시로 입국하여 메르주가까지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메르주가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이 마라케시에 있었고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마라케시에서 하루를 묵고 난 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메르주가로 출발하곤 했다.

마라케시에서 메르주가로 이동하는 중

  그렇게 도착한 마라케시에서 한국인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나와 나이가 같았고, 사막 투어 이후 쉐프샤우엔을 여행하려는 계획까지 일치했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전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친구는 모로코에 오기 전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왔다고 했다. 순례길을 준비했던 때부터 성공적으로 완주하기까지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경험은 다른 곳에서는 해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구멍 난 신발이 순례의 여정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순례길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지만,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수십 킬로를 걷는다는 말에 관심이 확 사그라들었다.

낙타를 타고 떠나는 사막투어

  그렇기에 해외여행을 계획할 때 순례길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걷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당시에 나는 가능한 많은 나라에 가고 많은 것을 보는 것에 여행의 목적을 두었기에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스페인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소였다. 여권에 최대한 많은 국가의 도장을 찍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2020년 2월, 비엔나에서 할슈타트로 가는 기차에서 배낭과 함께 여권을 도난당하고 나니 이러한 생각들이 사라졌고, 얼마나 많은 국가를 방문하는지보다 중요한 경험 하나하나가 내 인생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 년 전과는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조사해 보니 굉장히 흥미로웠다. 길 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목표한 마을에 도착하여 편안하게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가까운 인물 중에도 순례길을 걸어본 사람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였는데 그는 이 길을 걷는 중에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 인물을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알베르게에 머물며 일을 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후 그는 스페인에서 일했던 장점을 살려서 지금은 매우 바쁘고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가진 사고의 프레임을 바꾸기 위해서는 태국의 빠이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이 적합해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행기간이었다. 나는 아직 학위 논문 작성 중에 있었고, 심사와 통과에 대한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후 일정을 고려해야 했다. 만약 학위논문 발표를 다음 학기로 미뤄야겠다는 교수님의 확실한 결정이 있다면 여행 기간은 상관없겠지만, 왜인지 교수님께서는 확실한 대답을 주시지 않으셨다. 어쨌든 논문에 대한 피드백은 계속해주시고 있었으므로 통과의 가능성을 배제하면 안 됐다. 논문 심사 일정이 잡히고 통과가 된다면 본 논문 제출 날짜와 다음 학기 박사과정 입학 면접 사이의 기간이 3주 정도밖에 되지 않으므로 다른 여행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피드백을 받으러 교수님을 만난 어느 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글의 흐름이 이제는 좀 잡혔고

주장하는 내용이 아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니까 심사하는 것으로 하자."


  교수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물론 심사 날짜까지 쉬지 말고 공부하라는 말씀이셨겠지만, 이 말을 듣고 괜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하나 둘 일정이 확실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최종 논문을 제출하고 바로 출발하여 면접 전에 돌아오는 코스로 까미노를 걸을 것인지, 다른 국가를 갈 것인지 두 가지였다. 몇몇 사람들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순례길을 걷고 남은 구간은 다음에 와서 걸으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한 번에 완주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린 최종 결론은 논문 제출하고 출발해서 8월 졸업식 전까지 돌아오는 것이었다. 대학원 면접은 비대면 면접으로 응시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도 조교 2년을 하면서 학과를 위해 고생했는데 이 정도는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직 학위 논문 제출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논문은 통과되었고 졸업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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