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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가 뭐냐고요?

들어보긴 했으나...


도대체 오케스트라가 무엇일까요? 오케스트라는 서양 악기들이 많이 모여 함께 연주하는 악기계의 아이돌 그룹 같은 것인데요, 보통 10명 이내의 아이돌 그룹 멤버들보다 많은 4-50명의 연주자들이 조그만 막대기를 흔드는 지휘자의 리드에 따라 연주하는 것입니다. 직접 오케스트라 연주를 본 적은 없어도, 우리는 많은 오케스트라 연주에 익숙합니다. 예를 들자면, 올림픽 경기에서 메달을 따면 울려 퍼지는 애국가라던지, 드라마 혹은 유튜브에 BGM으로 깔리기도 하지요. 그저 무심코 지나가는 순간에도 우리는 많은 오케스트라 음악을 듣고 있는데요 다만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요.



지금의 오케스트라는 20-25명 정도의 바이올린, 7-8명 정도의 비올라, 그리고 5-6명 정도의 첼로, 3-4명의 더블베이스의 현 파트,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을 기본으로 한 목관악기, 그리고 호른, 트럼펫, 트롬본 튜바 등의 금관악기와 팀파니를 선두로 한 타악기들이 연주합니다. 다 합하면 적어도 50여 명의 연주자들이 함께 연주를 하지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개개인으로도 역량이 뛰어난 연주자들이지만, 일단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모이면, 지휘자의 통솔에 따라 하나의 악기처럼 음악을 연주합니다. 마치 우리가 핸드폰을 쓸 때 핸드폰 속의 각각의 부품들이 서로 자기의 역할을 하면서 편리성을 제공해 주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지휘자는 핸드폰 주인의 역할이지요. 특정 앱을 열어 실행시키듯, 오케스트라를 진두지휘합니다. 그럼, 오케스트라는 그 시작부터 이런 형태였을까요?




바로크 진주

오케스트라가 시작된 즈음을 우리는 바로크 시대라고 부릅니다. 사실 바로크란 못난이 진주를 부르는 이름이었대요. 1900년대 초반, 일본에서 양식에 성공하기 이전에는 동그란 형태의 진주를 자연에서 채굴하기가 힘들어, 모양이 고르지 않은 진주도 보석으로 취급됐는데요, 이런 진주들은 하나도 똑같은 게 없었다네요. 1600년에서 1750년대까지의 음악을 바로크 음악이라고 이름 지어준 것은 20세기 초반 음악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시기의 음악이 각양각색이고, 각 지역, 작곡가들마다 자신들의 음악적 색채를 다양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했기에, 이 시대의 음악을 바로크 음악으로 분류했다네요. 




이쯤 되면, 아마도 바로크 시대의 오케스트라는 지금의 형태와 같지는 않았다는 것은 대강 짐작되시지요? 바로크 시대만 해도, 음악 연주자들이 대개는 궁정이나 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얼마나 커다란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있느냐가 그 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네요. 영국의 헨리 8세는 64개의 현악기와 215개의 관악기를 소유하고 있었고, 엘리자베스 여왕 1 세는 40명의 현악 합주단이 궁정에서 상주했다네요. 프랑스에서는 야외 행사나 사냥 등의 의전을 담당할 관악기 합주단과 실내에서의 음악을 담당할 현악 합주단을 상주시켰다니, 음악인들의 월급이며 악기 매수, 수리, 유지 등에 꽤 많은 시간과 재원을 투자한 흔적이 보이지요? 현악기의 비율은 제1 바이올린,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 베이스의 비율이 5:4:3:2:1 정도로 비슷하게 유지됐었다면, 관악기는 자신들이 소장한 모든 악기를 다 연주하게 했다네요. 실지로, 18세기 후반 헨델 축제를 기념하기 위한 웨스터민스터 성당의 연주에는 총 245명의 연주자들이 동원됐는데요, 160여 명의 현악 연주자를 필두로 플루트 6명, 오보에와 바순이 각 26명, 호른과 트럼펫이 각각 12명, 그리고 호른은 6명의 연주자들이 연주를 했다네요. 지금으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오케스트라 편성이지요. 


소박한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형태: 건반악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왕실을 제외한 다른 군주들의 성에는 많은 인원의 음악가들이 없었기 때문에, 결혼식이나 축제, 장례식 같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연주가 가능한 연주자들을 불러 모아 연주를 했기 때문에 편성이 매번 다를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인지 바로크 오케스트라 악보는 악기가 지정돼 있지 않은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요, 이는 연주 당일, 연주가 가능한 연주자들이 파트를 나누어 연주하라고 그런 거라네요. 물론, 바로크 후기로 가면 악기도 지정되고 연주자들도 고정 연주자 혹은 아마추어들이라도 함께 연주하며 점점 그 틀이 갖추어 지기는 하지만요.. 




콜레기아 뮤지카를 스케치 한 풍경

오케스트라에 대한 관심은 이 무렵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합니다.  대학이 있는 도시마다 콜레기아 무지카(Collegia Musica)라는 애호가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하지요. 대학의 동아리 정도로 시작된 이 모임은, 처음에는 학생들과 교수들이 그 주를 이루었으나, 시민층까지 합세해 정규적으로 모여서 음악을 연주하고, 연구하고 또 후원하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대중 앞에 선보이고 싶어 했고, 18세기 초반에 독일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콘체르트(Gewandhauskonzert), 파리의 콩세르 스피리튀엘(Concert sprituel)등 기악 만의 공공 연주장이 마련되기 시작합니다. 말이 없이 악기들의 연주로만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이에 적합한 음악을 작곡한다는 것은, 대개는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감정을 드러내는 성악곡들 보다 더 심오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데요. 바로크에서 시작된 오케스트라의 발전은 후기 바로크로 갈수록 더욱더 지금의 형태를 닮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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