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를 보내며
사실상 새 학기를 시작하는 첫날, 넥슨의 김정주 이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들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친분은 없지만, 같은 시대를 살며 늘 부러워하고 선망했던 소문난 천재였기에 마음 한 구석이 서운해지네요.
제가 김정주 이사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바이올린을 배우던 저는, 당시로서는 음악 영재들의 등용문이라는 제29회 이화 경향 음악콩쿠르에서 1등을 한 김정주라는 친구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교수님 문하였던 그는, 음악에 대한 강한 의지도 없으면서 난다 긴다 하는 장안의 모든 바이올린을 하는 꼬맹이들이 출전한 콩쿠르에서 너무도 쉽게 1등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출전조차 못 해보았고, 당시, 2, 3등, 혹은 출전만 했던 친구들도 지금은 중견 음악가로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니, 당시 김정주 학생은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했지만, 당시 제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시던 교수님께서는 그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바이올린뿐 아니라 공부도 얼마나 잘하는지, 얼마나 예의가 바른 지에 대해 끝도 없이 칭찬을 하셨었습니다. 교수님께서 그의 칭찬을 하시는 날이면, 저는 왠지는 모르지만 집으로 오는 길, 엄마에게 꼬집히곤 했으니, 김정주, 참 얄미운 친구였습니다.
김정주 이사가 만약 10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그는 아마 바이올린을 계속하여 지금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80년, 우리는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당시는 예원학교라는 예체능계 중학교가 남녀 공학이었지만, 전교생 240명 중에 남학생이 저희 학년에는 2 명 입학했으니, 음악을 전공으로 하려는 남학생들도 대부분 예고를 진학하지 중학교는 남자 중학교로 진로를 정하곤 했습니다. 김정주 학생의 부모님과 교수님도 일단은 일반 남자 중학교를 보내는 것으로 결정하셨습니다. 공부도 악기도 다 잘하는 학생이니 양쪽을 병행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셨겠지요. 그런데, 신은 바이올리니스트 김정주보다는 개발자 김정주가 더 필요하셨던 모양입니다. 1980년 8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과외 금지 조치를 발표함으로, 예술학교에 다니지 않는 학생들의 교수 레슨이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일반 중학교에 다니던 김정주 이사는 더 이상 바이올린 레슨을 합법적으로 받을 수 없었고, 자연스레 악기를 그만두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그만두고도, 저의 지도교수님께서는 "정주가 서울대 공대에 갔단다", "정주가 게임 회사를 차려 크게 성공을 했단다" 등 김정주 이사에 대한 소식을 계속 전해주셨고, 저에게 김정주라는 사람은 예술과 과학을 연마하여 큰 성공을 이룬 천재로 각인되며,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어쩌면, 제가 김정주 이사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기에 그를 성공한 천재로, 행복한 천재로 자란 모범 케이스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목도한 천재의 삶과는 조금은 달랐거든요. 제 남편 최희준 역시, 테니스의 신동이었습니다. 김정주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또 다른 분야의 천재 소년이지요. 남편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테니스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듯합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인 코치들도 남편을 많이 탐냈었다 하네요. 호주로, 미국으로, 그는 14세 미만 시합들을 석권하며 또래 그룹의 선두로 자리매김했다 합니다. 언젠가 남편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릴 적, 어찌 그렇게 잘할 수 있었냐고요.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뭐, 선 안으로만 치면 되니까, 그게 어려워?" 라더군요. 너무 쉽게 이야기하여, 솔직히 좀 재수 없었습니다. 남편의 재능은 세계적인 선수들이 모여서 훈련을 한, 닉 볼레테리 테니스 아카데미에서도 탁월했던 모양입니다. 세계 1 위로 성장한 안드레아 아가시, 피터 샘프라스, 짐 커리어 등과 나란히 프로 테니스 선수가 되기 위한 엘리트 그룹에서 훈련을 하며 그는 "Dr. Choi"로 불렸답니다. 테니스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없어서랍니다. 솔직히, 처음 남편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자뻑이 좀 심하다 정도로 알아 들었는데, 후일 남편이 자신의 모교로 가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끔씩 훈련을 하러 오는 그의 친구들이 그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더군요. 테니스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요. TV에서나 보던 유명한 선수들이 남편을 "Dr. Choi"라고 부르며 다음 시즌 전략을 함께 짜는 게 무척 신기했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남편의 선수 생활을 꺾어 놓은 것은 또 다른 신군부의 대통령, 노태우 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서 열린 국제 대회에 참가했던 남편의 경기를 당시 체육부 장관이던 노태우 대통령이 직관을 하러 오셨답니다. 당시 남편은 여러 군데의 국내외 기업에서 후원을 받았고, 그 기업들의 로고를 유니폼 위에 부착하고 있었답니다. 이를 본 노태우 대통령이 고등학생이 무슨 광고냐며 당장 옷을 갈아입으라고 호통을 치셨답니다. 시합 중이던 남편에게 이 말이 전달되었고, 옷을 벗자니 후원 기업과의 계약 문제 때문에 곤란하고, 벗지 않자니 또 곤란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남편에게 관계자들은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시합을 계속하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답니다. 10여 분이 지나 겨우 옷을 갈아입고 계속된 시합을 이기기는 했으나, 그날로 기업 후원은 모두 끊어졌답니다. 즉시 옷을 갈아입고 시합을 계속하지 않은 괘씸죄가 적용되었었겠지요. 그렇게 테니스 신동, 올림픽 꿈나무, 세계 주니어 테니스 30위였던 남편의 선수 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답니다. 물론, 자비로 선수 생활을 할 수야 있었겠지만, 당시에 1 년에 10만 불 이상 드는 경비를 감당할 수 있는 집안이 몇이나 됐을까요? 게다가 학교에 있지 않으면 당장 군대에 가야 했으니, 남편은 대학 테니스 팀으로 진학을 했고, 세계 테니스와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남편의 천재성은 지도자로서도 그 빛을 발합니다. 닉 볼레테리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당시 톱 프로 플레이었던 토미 하스, 마리아 사라포바, 비너스와 세레나 윌리암즈 등의 프로 선수들을 전담하여 가르치며 시작한 그의 지도자 생활은 이형택 선수의 ATP 투어 우승, 이선용, 전웅선 선수의 세계 주니어 랭킹 1, 2 위, 중국 심천의 미션 힐스 테니스 아카데미 설립 및 심천 시 설립 30주년 기념 심천을 빛낸 30명의 외국인 선정, 중국 베이징 팀 감독 등을 역임하며 세계적인 선수를 끊임없이 길러 냈습니다. 하지만, 천재로, 신동으로 주목을 받던 그에게는 언제나 무엇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2018년, 심장암 판정을 받는 전날까지도, 그는 코트장에 나갔고, 2020년 1월, 산소 포화도가 떨어져 응급실을 가려 구급차를 기다리면서도 호주오픈을 실시간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딸아이의 생일은 늘 U.S. Open을 준비하러 미국에 가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받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고, 저는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이면 그저 남편의 카드로 제가 원하는 것을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1등이 아니면 1 등을 만들기 위해, 1 등이 되면 1 등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야 했던 테니스 신동 최희준, 과연 그의 삶은 행복했을까요?
김정주 이사의 비보를 접하며 놀라웠던 것은 그의 죽음이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많은 돈,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금수저 집안의 예쁜 두 딸을 가진 아버지, 대한민국 벤처 1 호라는 명예, 천재적인 머리, 그가 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기에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이전보다 더 성공해야 하고, 더 나아져야 하고, 더 발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짓누른 것은 아닐까요? 천재로 사는 것이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수월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미국에 있을 당시, "두기 하우저"라는 열네 살에 의사가 된 천재 소년을 소재로 한 시트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운전 면허 이전에 의사 면허를 딴 두기 하우저라는 소년의 직장과 가정에서의 일상을 그린 시트콤이었지요. 열여섯 살의 된 두기 하우저가 자신의 또래 집단과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어 무척 흥미롭게 시청했던 기억이 납니다. 천재란, 그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이지 결코 모든 면이 우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지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조금 더 생각을 깊게 했었다면, 제 딸아이를 영재로 키우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저는 음악적 재능이 있는 딸을 중학교, 고등학교를 건너뛰고 열일곱 살에 대학에 입학시켰습니다. 천식이 심한 아이가 학교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꾸 천식 발작을 해서 제 딴에는 스트레스가 있는 환경을 배제해 주자는 큰 뜻이 있었답니다. 입시를 치를 때는 그저 대학에 입학만 하면 졸업을 하겠지 하고 생각을 했지요. 물론, 입학과 졸업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본인보다 적어도 3살 이상 많은 동급생들과 어울려 성인도 청소년도 아닌 대학생으로서의 생활이 딸에게는 꽤 버거웠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일찍 학교에 들어온 천재소녀로서의 이미지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치를 높여 따라가기가 힘들었겠지요. 코로나로 붙어지내며 비로서 딸의 아픔을 볼 수 있게 된 못난 엄마는, 딸에게 죄인입니다.
The Good Die Young
세상은 언제나 천재에 열광합니다. 수학 천재, 영어 천재, 트로트 천재, 연기 천재, 심지어 얼굴 천재까지. 슬픈 것은, 천재로 스포트 라이트를 받다가도, 다른 분야의 천재가 나오면 또 관심이 우르르 다른 쪽으로 몰려갑니다. 잊혀진 천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천재는 단명을 한다는 말이 있지요. 천재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너무 어렸을 때 쏟아부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천재들에 대한 외부의 기대감과 이에 따른 압박감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50대에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도, 김정주 이사도, 또 제 남편도 결국은 주변의 기대치를 맞추기 위해 200%의 삶을 살다가 에너지를 다 쓰고 떠나버린 것 아닐까요?
혹시 천재인 자녀가 있다면, 천재가 아닌 인재로 키우시기를 추천합니다. 혹시 자신이 천재라면, 지금까지 이루어 낸 것도 충분하다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그냥 즐기면서 살아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은 천재도 필요하지만, 당신과 당신의 자녀가 꼭 필요하니까요.
천재로서의 생을 멋지게 살다 간 넥슨 김정주 이사의 명복을 빕니다. 훌륭한 삶을 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