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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한 수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러면 이루리라?

안되면 되게 하라


제가 갓 귀국해 특전사의 음악회에 연주를 하러 갔을 적, 특전사 앞 커다란 돌에 새겨져 있던 글귀입니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가서, 세상 물정 모르고 살던 제 가슴에 깊이 와닿더군요. 아, 이 나라에서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보다. 이후, 저는 불가능해 보이는 많은 일들을 가능하도록 만들며 고군분투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특전사 아니라 특전사 할아버지가 나타나셔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30여 년이 지나서야 깨닫습니다.




사실, 그 시작은 제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태생, 예를 들자면 국적, 성별, 부모, 혹은 생김새 등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간절한 집안에 첫아이인 손녀를 누구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먿쌔기"라고 부르신(어릴 적 저는 못나서 못 쌔기라고 한 줄 알았지만) 할머님의 마음은 이제 딸은 그만, 아들만 나오라는 말씀이셨답니다. 제 밑으로 연년생 손주를 둘이나 보시고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는 할머니에게 저는, 남동생 둘을 달고 온 복덩이이자 또한 그들을 지켜줄 방패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는 동생들을 챙기고 다녔습니다. 유난히도 사건사고가 많았던 장손인 큰 동생은 저랑 고작 1년 반 차이였지만, 왠지 모르게 그 아이에게 일이 생길 때마다 내 잘못인양 자책했었고, 무척이나 약았던 둘째 남동생을 제어하는 것도 내 몫이라 생각했고, 오빠들 이겨 먹는다고 할머니한테 괜히 구박받던 막내 여동생은 대학원 때까지 머리채 잡고 싸우면서도 늘 제가 돌봐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아니 지금까지도 제일 억울한 것은,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남자였으면 장군감인데", "여자라서 아깝다"라는 소리를 너무 들어서 남동생들에 대한 괜한 열등감이 있었고, 심지어 나이가 들어서도 "남자였다면'..." 하는 이야기를 들어가며 남자가 아닌 게 참으로 섭섭했습니다. 아무리 양성이 평등하다고 입으로 말하고 내가 여자라서 못 할 일이 없다고 해도, 제가 자란 시대는 남자는 직장을 나가서 돈을 벌어다 주고, 여자는 집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민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살던 시대라 그런지, 나는 남자도 될 수없고, 현모양처도 아닌 비주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더군요. 남자만큼 일을 해도, 공부를 해도, 저는 여자였고 그 누구도 이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은 성별만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이것도 저에게는 선택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저희 친가는 기독교 집안은 아닌, 그저 샤머니즘을 믿는 평범한 가정이었지만, 저는 달랐습니다. 이북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순교하신 외할아버지가 신학교를 졸업하시던 해에 낳으신 어머님은, 세상에 교회 다니지 않는 집은 없는 줄 아셨답니다. 미션계 대학교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나신 아버지는 심지어 노래를 너무 좋아하셔서,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 성가대에 들어가 매주 교회에 다니셨기에 아무 의심도 없으셨답니다. 다만 결혼하실 때, 할머니께서 한 집안에 신이 둘이면 안된다며 큰아들인 아버지가 아닌 고모와 함께 사신다고 하셨을 때, 그냥 시집살이 안 해서 좋으셨답니다. 할머니는 1달에 2번씩 집에서 고사를 지내셨지만 정작 어머님은 외출하라 하시고 지내셨기에, 그저 그런 줄 아셨답니다. 어머니와 달리, 저는 어릴 적 고사를 지내러 집에 오시는 보살님과 심방 오시는 목사님들 사이에서 영악스럽게도 "나무아미타불"과 "아멘"을 타이밍 맞추어 외쳐대며,신들의 대결을 보아왔고,  결국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신 할머니를 따라 일요일마다 교회에 갔습니다. 할머니가 기독교를 선택하신 후, 우리 집안의 종교는 기독교로 정해졌습니다. 온 집안이 한 교회에 다니고, 절에 다니시고 무당을 찾아가던 다른 친척들도 모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초등학교 1 학년 때이니 저에게는 선택이란 생각할 수 없는 옵션이었습니다. 한번 불붙은 할머님은 무섭게 기독교에 빠져드셨고, 저는 그저 많은 모태신앙인이 그렇듯이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기독교인이 되어갔습니다. 불교 초등학교를 나와, 미션계 중고등학교를 나와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저에게 기독교란 그저 생활의 일부라고나 할까요? 기도하라서 기도를 하고, 성경 읽으라고 해서 성경을 읽고, 헌금하래서 헌금을 했지만, 실지로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믿냐고 하면,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는 게 솔직한 대답일 것 같네요. 어릴 적, 무당집과 교회 사이의 한옥집에서 살던 저는 사실 예배보다 굿하는걸 더 많이 보고 자랐기에, 뭐, 신이 거기서 거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끔, 기도로 예언을 한다던지, 병을 고친다던지 하는 권사님이나 목사님들의 얼굴에서 그때 그 무당 할머니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거든요.




신과 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열심히 기도한 적도 없지만, 사실 생각하고 보면, 신이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 제 소원은 "바이올리니스트"였습니다. 왠지 멋있어 보이고, 있어 보였거든요. 제 친구들의 소원이 "현모양처" 혹은 "교사" 등의 구체적이었던 것이라면, 저는 그저 "바이올리니스트"였습니다. 그 후 저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됐습니다. 단지 제가 제 기도 제목 앞에 "세계적인", 혹은 "연주로 밥벌이를 하는"같은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저는 무늬는 바이올리니스트지만 실상은 레슨과 출강을 업으로 하는 연주를 할 줄도 알지만 그다지 많이 연주를 할 수는 없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더군요. 제30대의 기도는 "교수"가 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딱 그만큼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겸임교수, 초빙교수 등 계약직 교수가 되었고, 정규직 교수는 되지 못한 채, 이곳저곳 보따리 장사를 하며 이제는 교수가 됐어도 은퇴를 생각할 나이가 되었네요. 제가 "정규직, 정년 보장 교수"가 되게 해 달라고 했으면 그렇게 되었을까요? 가끔, 신과 저의 관계를 생각하면, 제가 구체적으로 원하지 않았기에 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하네요.




신이 제 기도에 가장 격하게 반응을 해 주신 것은 배우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집안에서 미운 오리 새끼로, 남동생들에게 "못생긴 누나" 취급받던 저의 가장 큰 고민은 과연 뚱뚱하고 못생기고 재수 없는(? 동생들 표현에 의하면)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했습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게 해 달라고. 이왕이면 영어를 잘하는 남편을 만나게 해 달라고. 신은 기가 막히게 제 기도를 들어주셨고, 저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기적적으로 결혼을 했습니다. 남동생들은 누나를 구해준 매형을 친형처럼 모셨고, 남편은 제 동생들을 자기 식구처럼 챙겼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일에 완벽한 남편이 너무 멋지고 훌륭해 보였지만, 아기를 낳고, 서울에 돌아와 안 되는 일들을 되게 해야 하는 삶을 살다 보니, 완벽한 남편이 부담스럽더군요. 특히, 자기 몸을 열심히 돌보는 남편이 골골대는 저를 나중에 늙어서 병시중할 생각을 하니, 끔찍했습니다. 밥 숟가락을 놓는 순간 타이머를 켜고 30분 후 알람이 울리면 "약"하고 제가 무엇을 하고 있어도 내밀 것 같은 남편의 성격이 살짝 부담이 돼더라고요. 그래서 제40대의 기도는 노년을 혼자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신이 내린 처방과 같은 엄청난 결말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워낙 글로벌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산다던지, 그냥 친구로 다시 남는다던지 하는 거였지요. 하지만, 신은 저의 기도를 너무도 진실되게 들어주셨습니다. 남편은 희귀병에 걸리게 되고, 약을 챙겨야 하는 사람은 제가 되었습니다. 제 기도 때문인지 신은 남편을 한국이 아닌 천국으로 불러주었고 , 저는 소원대로 홀로 살게 됐네요.  물론, 제가 원했던 것은 그리 먼 나라에 남편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전화 통화와 문자 정도는 되는 곳으로 보내달란 이야기였는데, 물론 화상 통화는 안됐으면 했지만요. 신은 세상 드라마틱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저를 혼자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건, 기도가 이루어진 걸까요 아님 저한테 보기 좋게 한방 먹이신 걸까요?



신은 제가 얄미웠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 좋은 것은 죄다 몰아줬는데도, 남자가 아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다, 정교수가 못된다 하고 불평만 하고, 정작 주어진 것에 감사라고는 몰랐던 인간이니까요. 태어날 때부터 천국행 KTX 티켓 특실인 모태신앙에 순교의 피까지 몰아줬는데도 무당집이나 훔쳐보고 귀신이 보인다는 헛소리나 하고, 평생을 뒤치다꺼리해주며 관리 잘해 줄 남자를 배우자로 보냈더니 숨이 막힌다는 둥, 다른 나라에 살게 해 달라는 둥 복에 겨운 소리를 해대니, 모든 걸 도로 뺏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 기도하고 있었고, 신을 따르기에, 다 뺏아가기도 난감했겠지요. 그래서 저의 기도를 부분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원하는 것만 꼭 집어서 들어주기로 맘을 먹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별로 기도할 게 없어. 원하는 게 없거든." 하고 오만에 차서 나대는 제가 얼마나 꼴이 보기 싫었겠습니까. 신이 인간의 마음을 가졌다면 말이지요. 사실, 제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준 신에게 제가 불평할 부분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신은 제게 기도의 끈을 놓지 못하게 고삐를 채워버렸습니다.





이제는 좀 더 구체적인 일들을 놓고 기도하려 합니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딸이 결혼하게 해 주세요, 아버지 어머니가 제 구순 잔치까지 열어 주시게 해 주세요, 평생 돈이 많지는 않아도 걱정 없이 한 달에 얼마 이상 생기게 해 주세요라고요. 평생을 "Jesus, Thank for everything,  Amen!" 수준으로 기도 하던 저의 20초 기도 시간이 3분으로, 10분으로, 30분으로, 1 시간으로 늘어가고 있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지요. 어쩜 이게 신이 원하는 저의 쓰임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을 신에게 기대어 살았으니, 이제는 자신을 증거하고 선포하라고요. 평생을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 만으로만 죄 사함을 받는 줄 알고, 난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던 제가, 조금 더 신에게 가까워져야 하는 것 아닐까 하고 극단적으로 신학교를 가서 목사님이 돼야 하나 하고 심각한 고민이 들 때가 있지요. 하지만, 공부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기에, 그냥 패스하는 걸로. 그래서 주님을 증거 하고 간증해야 하는 김집사, 요즘 또 조금 삶이 편안해졌는지, 이거, 내가 만약 기독교인 아니라 어디 중동 국가의 이슬람교도로 태어났으면 신이 나에게 어쨌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또 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겠지요? 서로가 서로를 긴장하게 만드는 신과 나, 그래도, 그의 한 수는 늘 저를 무릎 꿇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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