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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해서 유정이다

과부라서 행복해요

브런치에 글을 쓴 지 20여 일 돼갑니다. 처음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접속하였을 때 저를 맞아 준 글은 "나는 작가다" 공모전에 대한 안내였습니다. 마치 나에게 꼭 글을 써야 하는 의무감을 부여하는 것처럼, 공모전 안내는 저에게는 숙제이자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단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이 무언지 정의 내릴 수 있을 테니까요. 평소 글을 쓸 때 맞춤법 검사도 안 하는 제가, 수많은 글들을 작가의 서랍에 저장했다가 지워 버렸습니다. 제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더군요. 게다가 그중 30여 년을 한 사람과 보내고 떠나보낸 뒤, 다시 혼자 서야 하는 제 자신을 가식 없이 드러낸다는 일이 말이지요.


올 2월, 저는 스물에 만나 연애를 하고 30년을 부부로 지내던 남편을 떠나보냈습니다. 심장암의 일종인 원발성 활액막 육종이라는 전 세계에서 통틀어 약 70명 정도 보고 됐다는 희귀병에 걸린 남편은 2년여를 씩씩하게 투병하다 결국은 희귀암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불려 갔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 식구들 중에 희귀병에 걸린 것은 남편만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저의 유방 외 파제트 병이라는 피부암의 일종이나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병 같지 않은 병에서 시작했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것처럼 엄살에 떨던 저를 신랑의 심장암은 제가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었고, 이후 하나밖에 없는 유학 간 딸아이가 길랑 바레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고는  기가 막히지도 않더라도요.  그렇지 최고야 엄마 김유정은 이길 수 있어! 제 마음 속 저 구석에 숨어있던 무엇이든 잘될 거야 하는 쓸데없이 긍정적인 마인드와 어떠한 나쁜 상황에서도 주변을 웃음 짓게 만들 수 있는 다크 유머가 저를 이 어려운 상황을 대면하고, 헤쳐나갈 수 있게 만들더라고요.


지난 2 월, 중환자실에서 1 달여를 보낸 남편이 천국으로 간 뒤 빈소를 차리고 가장 먼저 제가 상주로서 맞은 손님은 저희 작은 아버지 댁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셔서, 일흔이 넘으셨어도 저에게는 아직 삼촌인 작은아버지와 세상 고우신 작은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저를 꼭 안아주셨을 때 제가 던진 첫마디는 "작은엄마, 저 과부 됐어요"였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려다 말고, 삼촌과 작은 엄마는 빵 터지시며, "그래, 유정이답다! 과부면 어때, 우리 다 옆에 있는데" 하시고는 제가 아직 정신 있으니 걱정 마시라며 저희 친정 부모님을 열심히 위로해 주셨습니다.


다크 유머가 저에게도 타고난 재능은 아닙니다. 저의 이 재능은 천국에 가 계신 남편께서 개발하고, 30년을 발전시켜주신, 후천적 재능입니다. 저희 부부는 진짜 남달랐습니다. 체능인인 남편과 예능인인 부인이 만나, 남편은 아침 일찍부터 훈련하고 집에 들어와 쉴 때쯤이면 예능인 부인은 학교가 끝나는 시간부터 예능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이면 예쁘게 화장을 하고는 음악회 구경을 가거나 연주를 하러 나가야 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남편은 아침 이슬을 맞고 나가고 밤에 나가는 부인은 참이슬을 마시고 들어왔지요.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는지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게다가, 그는 컵에 물이 반이 있으면, 컵이 찰랑거리도록 채워놓아야 직성이 풀리고, 저는 물이 남아 있으니 오늘 저녁은 문제 없겠군 하며  안심을 하곤 했으니 일상 소소한 일에 서로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특히 저를 못 견디게 만든 것은 남편의 올곧은 성격이었습니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모든 일을 법대로 해야 하고 깨끗하고 깔끔하게 해내야 하는 그의 성격은 아마도 너무 어릴 적 유학생으로 외국에 가서 홀로 시합을 다니며 자신의 것들을 챙겨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요구했고, 그것이 아니면 영락없이 지적질을 하곤 했지요. 갑자기 운전을 하다가 시비가 붙거나,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어깨라도 부딪히면 가서 10배로 갚아주는 그의 성격은 누구의 마음이라도 상하지 않도록 지고 살라고 평생을 교육받은 저의 성격과 너무 달라 힘이 들었습니다. 딸아이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즈음이었던 듯합니다. 남편과 같이 차를 타고 가다 주차 때문에 시비가 붙었는데, 딸이 아빠 화났어? 하고 묻기에, 아니 아빠가 교통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지키지 않은 아저씨를 혼내는 거야 하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런데, 그리 얼버무리고 나니 제 마음도 너무 편해지고 또 남편이 밉지 않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이후로 남편은 화내는 사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교통질서를 바로잡고, 서비스업계의 질적 향상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훌륭한 남편께서 진짜 오래 사실 줄 알았습니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 해서요. 지적당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쌍욕이 나와도 제가 드릴 말씀이 없을 만큼 호되게 바른말을 하셨거든요. 다행인 것은, 남편이 재벌집이나 이렇게 어마어마한 집안에 태어났다면 땅콩 회항을 2000년도 이전에 벌써 하시고는 사회의 물의를 일으켰을겁니다. 평범함이 참 다행이었던 분이, 저에게 이렇게 어마 무지한 재주를 주고 떠나셨네요.


남편을 천국으로 보냈지만, 그래도 저에게 가장 힘들었던 일은 제 딸 최고야를 유학 간 미국에서 사지가 마비된 채로 병명도 모르고 데리고 올 때였습니다. 이미 남편의 심장암도 알고 있었고, 또 저와 가장 친하던 사촌오빠를 심장마비로 떠나보냈기에, 웬만한 일에서는 충격을 받지 않았을 텐데, 걷지 못하는 딸을 보니 하늘이 무너지더군요. 제가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가르치며 내 팔자야 교향곡이라고 가르치는데, 정말 아이고 내 팔자야 하고 한숨이 나오더라고요. 그래도 늘 웃고 발랄한 엄마만을 봐왔던 딸아이 앞에서 한숨을 쉬거나 눈물지으며 불안하게 만들 수는 없기에, 계속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대며 깔깔거렸지만, 제 가슴은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신을 원망하며 피를 토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 아이가 입원을 해 길랑 바레라는 희귀병으로 진단을 받을 때까지 열흘여를 저는 지옥 불구덩이 속에 내동댕이쳐져 있었습니다. 항암 중인 남편에게도, 입원 중인 딸아이에게도 눈물을 보일 수 없었던 저는 가슴으로 우는 법을 배웠고,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으니까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 거라고 끝없이 자가 최면을 걸어댔습니다.


저라서 이겨낸 걸까요. 다행히도 딸아이는 3개월 후부터 조금씩 걷기 시작했고, 이제는 악기도 하고 하이힐을 신고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됐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딸아이는 약 한 달 반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암환자인 아빠와 미친 듯이 싸우기 시작해서 서로 있는 정, 없는 정 다 떼더니, 아빠가 중환자실에 있는 한 달 동안 매일 출근하며 다시 정을 붙이고, 이제는 청개구리처럼 아빠가 원하던 대로 절도있고 규칙적으로 살고 있으니, 참,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물론,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저는 신이 저희 모녀에게, 이산가족처럼 지내던 저희 세 식구에게, 1년 반이라는 꿈과 같은 이별의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는 모든 일들을 일사천리로 빨리빨리 하던 남편은 아마 천국에 가서도 모든 것을 준비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한 번은 서로와 이별을 해야 하는데, 남아있는 사람이 그가 아니라 저라서 참 다행이기도 하고요. 그는 제가 없는 세상을 저보다 백배는 더 힘들어했을 테니까요.


어제는 남편의 생일이었습니다. 친정에 얹혀사는 저를 친정 동생들과 올케, 제부에 조카들까지 다 찾아왔더군요. 아무도 남편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저희는 모두 알았습니다. 8월 8일, 참 잊기 힘든 날이거든요. 남편은 갔는데, 남편에게 테니스를 배웠던 조카들, 남편과 적어도 1 달 이상부터 4 년까지 미국서 함께했던 동생들, 남편이 시합이나 훈련 때문에 들러도 기쁘게 맞아주던 올케들과 제부, 그리고 아들보다 사위 데리고 산 날이 더 많으시다는 친정부모님, 저희 모두 제각각의 방법으로 그를 기렸습니다. 이제 남편은 없는데 케이크 사다가 놓고 촛불 붙이는건 좀 아니잖아요.


나가는 길에, 올케가 지나가는 말처럼, "형님, 오늘 잘 지내세요. 형님 씩씩하잖아"하고 집을 나서더라고요. 그래서 올케가 시키는 대로 씩씩하게 오늘은 데이트가 없으신 따님과 다이소에 갔다가 저녁을 먹고 들어왔습니다. 저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물 잔의 비워진 쪽은 보지 못하는 반푼이 같은 무한 긍정 마인드로 주변 사람들을 재미있고 즐겁게 만들 수 있는 다크 유머를 날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왜냐고요? 저는 김유정이니까요. 김유정은 씩씩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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