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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됐습니다

음악 평생 했는데 글 며칠 끄적거리고  상 받았네요

    지난 21일 금요일, 저는 나도 작가다 공모전의 밀크 PD 님으로부터 제3차 나도 작가다 공모전에 당선되었다는 메시지 하나를 받았습니다.  전 가족이 희귀병에 걸리고, 사지마비가 됐던 딸과 하늘나라로 이사를 가신 남편 이야기를 써내려 가면서, 참 사연으로는 더 이상 기구한 사연이 없겠구나 했지만, 진짜로 당선될 줄은 몰랐거든요.



    글보다 바이올린을 먼저 배운 저에게 한글을 익히는 것은 어머님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유치원에 입학하고 나서, 담임 선생님께서 제가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통보받으신 어머님은 그때서야 부랴부랴 어린이 이야기 성경 전집과 어린이 한국사 전집을 집에 들여놓으시고, 당시 저희 남매들을 돌보아 주던 언니에게 저에게 글을 가르쳐 주라 하셨습니다. 저는 글을 삐뚤빼뚤 엉터리로 쓰면서도, 어머님이 사주신 두꺼운 책들을 읽으며, 때로는 성모 마리아로 말구유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때로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으로 만주 벌판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불행히도 저는 1970년대에 눈이 나빠 반에서 안경을 끼는 유일한 존재였고, 책을 많이 보면 눈이 나빠진다는 당시의 검증되지 않은 낭설에, 저의 독서는 저희 집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책을 그만 읽으라는 어머님의 성화에 저는 이불속에 들어가 손전등을 켜고 몰래 어머님이 사 주신 책이 나른 나른 해 질 때까지 읽었습니다. 바이올린 연습을 하며 책을 악보대 위에 놓고 연습하다 걸려 엄청 맞기도 했지만, 저는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는 책 속의 세계가 너무도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왜 못 알아보셨을까요? 제가 음악보다 책과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음악에는 그리 연습 시작하기가 힘든 제가 활자라면 생선 싸온 봉투까지 다 읽어버린다는 것을요.

안경 끼고 바이올린 하던 유치원 때

    교내 백일장은 그저 공부를 잘하니 당선되겠거니 했던 저의 서툰 글솜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통일 글짓기 대회에서 서울 지역 대상을 받고서야 그 진가를 발휘하나 했습니다. 그때 또한 순교하신 외할아버지에 대해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글을 쏟아 내었기에, 뭐 교내 백일장 장원 정도 받고 싶었는데, 어떻게 서울시 대상을 받고 서울시 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지금은 자동차 극장이 돼 버린 당시 통일 문화원(? 명칭이 정확 치는 않으나 지금 평화 총일 자문 위원회가 있는 자리)에서 합숙을 하며 당시로서는 생각도 못해볼 2층 침대가 있는 숙소와 DMZ 견학에, 군부대 견학을 가고 군대에서 밥을 먹는 듯 꽤나 흥미로운 일정이었습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3년 후 였던 것을 생각하면, 초등학생들이 남북 분단의 현장을 직접 경험할 다시는 없을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신은 제가 바이올린을 계속하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예중 입시를 두 달여 앞에 두고 하루에 열 시간씩 연습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합숙까지 하는 글짓기라니. 걱정하시는 바이올린 선생님께 겨우 사정해서 통일 글짓기 합숙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는 전날 밤부터 39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며 집에서 300미터도 되지 않는 통일원은 들어가서 인사도 끝나기 전, 토악질을 하며 병원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3일 내내 고열에 시달리던 저는 겨우 백일장 당일, 대회장에 들어가서 5분 안에 무엇인가 끄적거리고 나와 또 병원으로 실려갔던 것 이외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결과는 물론 땡이지요. 그때 저보다 한 살 어린 서울 우수상을 받았던 꼬마가 장원을 했는데, 가끔, 그 친구는 글을 계속 썼을까 궁금하긴 하더라고요. 통일 글짓기 대상을 타고 예중을 떨어졌더라면 제 인생이 좀 달라졌을 까요?



    글을 좋아한다고 중고등학교 국어에 탁월한 성적을 내지는 못하더군요. 예중, 예고에 진학해서 바이올린 등수에 집착하다, 어쩌다가 신문사 콩쿠르에 입선하여, 저는 어영부영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서울예고 재학 중 대한민국 음악제 출연




    저의 글솜씨를 알아봐 주신 분은 의외로 미국의 대학 기초 작문 수업을 가르쳐 주신 교수님이셨습니다. 공부가 아닌 바이올린을 하러 유학을 갔지만, 대학에서 "교양과목"이라는 것을 이수해야 하고, 대학 영어 기초 작문은 필수 수업이었습니다. 한국어로 해도 쉽지 않을 작문 수업을 영어로 들어야 해서, 졸업 전까지 미루고 있다가, 졸업 직전, 마지막 학기에 수강했습니다. 저는 물론 허덕거리며 남들 3페이지 써낼 때 겨우 1페이지 써내곤 하는 지진아였지만, 교수님은 늘, 내용이 너무 좋다, 표현력이 남다르다 하시며 저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리포트로 써낸 제가 유학 오기 직전 남사친과 함께 들렸던 이대 앞 어떤 다락방 같던 카페에 대한 이야기는 교수님께서 마치 자기가 그 카페에 다녀온 것 같다며 칭찬하셨습니다. 미국 교수님들은 워낙 용기를 많이 주시기에, 저는 그저 용기를 주려 하시는 말씀이시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성적표에 A를 딱 찍어주시며 저에게 자신이 하신 말씀이 진심이셨다고 증명해 보여 주셨습니다. 이후, 그 수업에서 배웠던 글을 쓰는 비법들은 박사학위 논문에도, 지금 이 글에도 적용되고 있고요.




어머님을 작가로 만드신 훌륭하신 따님

    결혼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낳고,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을 하며, 점점 글과 멀어지던 저에게 다시 글을 쓰게 해 준 것은 스마트폰이었습니다. 직업의 특성상, 한군데 오래 앉아 컴퓨터에서 글을 쓸 수 없었던 저에게 스마트폰은 비는 시간을 메워주고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오랜 친구들과 다시 연결해 주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듯이 페이스 북이며 트위터며 글을 올렸고 재미있다고 반응하는 친구의 친구들과도 알게 되었습니다. 페이스북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제가 만 15세에 대학에 집어넣은 딸 때문이었습니다. 바쁜 아빠와 더 바쁜 엄마를 부모로 둔 아이는 소아천식으로 오래 고생을 했고, 각자가 다 조기 유학을 했던  우리 부부에게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이지 아이의 성공이 아니었기에, 아이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또래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입학할 때, 서울의 한 사립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너무 속성으로 하고, 대학에 들어간 딸은 실기보다 학과 과정을 더 힘들어했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대학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문제는, 3학년이 되어 전공 필수 과목인 서양음악사를 들어야 하는데, 딸과 내가 둘이 앉아 공부를 하자니 시간도 안 맞고 또 잡담하다 끝나고. 수업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주요 개요만 적어 보내니, 딸의 눈높이와 맞지 않고, 해서 페이스북에다가 옛날이야기해 주듯이 서양음악사를 풀어 적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딸이 좋아요를 눌렀더라고요! 사생활 침해라고 친구 신청도 받아주지 않던 딸이 말이에요. 그래서 신나게 올렸습니다. 딱 딸이 힘들어하는 바로크 시대까지요. 그다음은 좀 쉽거든요. 그런데, 딸을 위해 쓴 서양음악사 이야기 덕에 갑자기 여러 가지 이유로 바이올린을 못 잡게 된 저에게 서양음악사, 현악 문헌 이런 강의 제의들이 오는 겁니다. 신기하게도 저는 그래서 악기도 가르치지만 문헌을 가르치고 강의를 하는, 또 다른 형태의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남편은 이형택선수와 3년여를 함께했다


    지난 2년간 저는 남편의 심장암을 간호했고, 남편을 천국에 보내야 했습니다. 아직도 병원에서 받은 수면제와 안정제를 한 주먹은 먹어야 잠에 들 수 있고, 일주일에 3-4 일은 남편이 살아 돌아오는 꿈을 꾸며 여러 가지로 바닥을 치고 있는 저를 일으켜준 것은 무서운 후배였습니다. 식구들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었던 후배는 우울증,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저를 무섭게 몰아쳐서, 요가를 함께 다니고, 집에 와서 저녁을 만들어 주고 하면서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옛날에 제가 썼던 글들이 재미있었다며 또 써보라고 용기를 주더라고요. 마침, 블로그도 정리할 겸, 남편의 글들도 모아 책으로 내줄까 하며 옛날 블로그글들을 다시 쓰기 시작했고, 페이스북에 공유된 글을 그 무서운 후배가 또 너무 재미있다며 요가를 같이 오래 하신 진짜 작가님께 보여드려, 그 작가님의 소개로 브런치에 입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직업란에 한 가지를 더 쓸 수 있게 됐네요, 작가라고요.


겁도 없이 나의 미운 오리 새끼 시절을 뜬금없이 페북에 올린 무서운 후배

    참 먼 길을 돌아 돌아 여기까지 왔네요. 이제부터 어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아야 할까, 벌써부터 걱정이 되네요. 남편이 가고 악기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었는데, 글을 쓰는 것은 힐링이 많이 되네요. 브런치에 글이 올라가자마자 교정 봐서 보내주는 친구, 문맥을 지적해주는 친구들의 카톡 알람이 울리니 살아있음을, 사랑받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그와 너무 갑자기, 너무 빨리 헤어졌지만, 저는 늘 그렇듯이 뒤에 남아서 그의 이야기, 그와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딸 이야기를 한없이 남기고 가렵니다. 작가 김유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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