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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bald, and widowed.

but happy to be alive!

나는 여자 대머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굉장히 심한 원형 탈모증을 앓고 있다.

하지만, 내 머리카락이 서로 멀리 떨어져 듬성듬성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너무 어릴 적부터 앓아 왔던 병이기에, 가리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영혼 1990

이 모든 것은 인디애나의 어느 작은 시골 극장에서 이 한 편의 영화를 보며 시작됐다.

막 결혼을 해 신혼이었던 나와 남편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영화를 보며

서로 끝까지 함께하자고 다짐을 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접신 장면이라던지,

주인공 남녀 배우가 도자기를 함께 빚는 장면은

연인이라며 누구나 한 번은 해보고픈, 멋진 장면이었다.

사랑과 영혼 명장면

  내 남편은 저 남자 주인공만큼 근육질이고 멋지고,

나도 뭐, 저 여주인공보다 빠질 것은 없는데,

아뿔싸,

결혼식 하고 미국 와서 지내다 보니 머리가 너무 길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자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의 오류가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동양인을 전부 셀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인디애나의 소도시,

이 도시의 미용사들 중에 동양인의 머리를 잘라 본 미용사가 없었던 것이다.

무조건 결심하면 해야 하는 내 성격에,

그 옛날, 미장원을 전화번호부에서 찾아,

사진 한 장 들고 가서, 이렇게 똑같이 잘라주세요, 했다.

내 머리는 흑색이고, 얼굴형 역시 데미 무어 못지않게 작고 귀엽다고 생각한 나는

용감하게 컷트보를 두르고 담당 미용사에게 나의 머리를 맡겼다.

다 자르고, 괜찮냐는 질문에, 앞에서 보기에 괜찮기도 하고, 영어로 길게 말하기도 복잡하고

그냥 "Okay, thank you" 하고 팁까지 두둑이 주고 나왔다.

그런데,

나를 데리러 온 남편이 내 머리를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갑자기

여기는 왜 밀었어? 하며 한 부분을 가르쳤다.

주인공의 머리

내가 원했던 것은 저 주인공의 헤어컷이었는데,

남편에게 보이는 건

길창덕, 꺼벙이

위의 꺼벙이 머리였던 것이다.

아니, 새색시가 꺼벙이가 웬 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다음날 당장 뛰어간 곳은 학교 병원이었다.

내 상태를 보신 의사 선생님께서는 "alopecia areata"라고 말씀해 주시며,

주사와 약물 치료를 병행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청운의 뜻을 품고 유학길에 올라, 결혼까지 하고 공부 마치고 금의환향할 생각에 들떠있던 나에게,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병에 머리가 빠지고, 주사 맞고 치료하라니,

내가 러브스토리 주인공인 건가?

나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집에는 알려야 하기에,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집에 전화를 했는데,

뜻밖에 부모님께서 놀라지 않으시며, 신경 쓰면 그렇다고, 울 아버지도 그러셨는데 유전이라고,

주사 맞아도 다시 나고 안 맞아도 저절로 머리카락 생긴다며 걱정 말라시는거다.

그래서

난, 진짜 걱정 안 하고, 꺼벙이로 학교를 다니니까, 정말 머리가 다시 나오기에,

역시, 부모님은 진리다 하며 걱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귀국하고 난 뒤에도 나는 가끔 꺼벙이가 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병원 가서, 주사도 맞고 두피 클리닉 이런데도 다녀 보고했지만,

내 생각만큼 갑자기 모발이 많아지고, 이러지는 않아,

그냥 땜빵 잘 피해서 머리 잘라주시는 미용실 원장님에게 머리를 맡겼었다.

정작, 나는 안보이니까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를 늘 보시던 교회 권사님들, 친한 선배들이 탈모클리닉 번호도 주고, 부분가발도 알려주시고 해서

몇 년 전부터 나는 머리에 모자 쓰듯이 가발 얹고 다니는 게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그렇다고 내가 탈모 클리닉에 다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안양, 안산, 명동, 유명하다는 탈모 클리닉은 다 다닌 것 같고,

심지어 한 군데서는 너무 효과를 봐서 나의 before & after 사진을 홍보에 써도 되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가발 모자를 얹으면 머리를 미장원 가서 한 것처럼 말끔하니까,

또, 얼굴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 그냥 쓰시라고 했다.

지금 어딘가에 나의 탈모 클리닉 전후 사진이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탈모와의 싸움은 내가 피부암의 일종인 유방 외 파제트병에 걸리면서 끝이 나고야 만다.

내가 먹었던 약이, 피부에 모발이 나게 하는 약인데, 피부에 암이 생겼다니,

과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지만, 탈모클리닉 약을 계속 먹는 것은 아무래도 찝찝함은 남아있어,

나의 탈모 클리닉 탐방기는 여기서 끝을 맺나 보다, 하며 모발 이식을 알아봤었다.

그런데,

나와 모발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지, 내가 이식을 알아보던 그즈음,

모발 이식받던 어떤 40대 여자 대학 교수가, 수술 중 잘못되어 가사상태에 빠지고 사망하는 일이 생겨,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자고 저걸 하나 싶어서, 그대로 접었다.

내 사진이 있을 수도


이후, 남편과 딸이 희귀병으로 투병하면서, 나는 그냥 가발 모자 선생님으로,

어떨 때는 학교 가기 민망할 정도로 비뚤어지게 가발을 덮어쓰고,

간병에, 일에, 집안일에 나를 돌아볼 수 없이 바빴다.

간병 스트레스와 편식과 폭식을 일삼는 나의 생활 패턴은 나의 원형 탈모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기 시작했고,

나는 부분 가발에서, 조금 더 큰 부분가발, 반가발, 드디어 전체 가발로 바꾸어 타면서도,

내 원형탈모는 언제나 내 관심 밖이었다.

심지어 남편이 중환자실에 있을 때, 나는 눈썹 문신을 하고 가발을 사며 장례식을 대비했으니,

혼자는 돼도, 반쪽 눈썹과 반밖에 남지 않은 머리카락은 세상에 내보이기 싫었었나 보다.




남편이 가고, 나를 돌아보니,

김유정은 간데없고,

10킬로짜리 수박 두 개를 온몸에 짊어지고, 머리카락은 반만 남은 골룸이 거울 앞에 서있는 게 아닌가!

남편이 가서 그리워서 울고, 혼자 남아 서러워서 울고,

날 이리 만들고 간 남편이 야속해서 울고, 코로나에 답답해서 울고,

울다 울다 지쳐가는 나에게 탈모 클리닉을 알려주는 후배가 있어,

날짜 잡고 가기로 약속 다 했는데, 그만 그 병원에 확진자가 다녀가서 2 주 휴업이란다.

나와 모발은 이리도 친해지기 힘든 것일까?


그래도 요즘, 집에 있으니 가발 쓰고 나다닐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올라와,

딸이랑 보면서, 야, 여기도 났다, 저기도 났다 하고 신기해하고 있다.

어쩌면, 이제는 나를 위해 영양도 좀 챙겨주고, 모발 관리도 좀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 해봤다.

어쩌면, 나는 평생 모발이 없는 왼쪽 인형처럼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함께하고

또 천국 가서 만날 식구들을 생각하면, 그까짓 머리 대머리면 어떠냐!

점점 가발 기술도 좋아지는데, 그냥 가발 쓰고 다니지! 하면서

오늘도 초 긍정의 힘으로 깔깔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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