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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고 나만 남아서

행복해도 될까요?

남편을 떠나보낸 지 반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평소에는 그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 할 만큼 점점 그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지만, 그래도 이름이 붙은 날들은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나 커 보여, 목이 메어오네요.



오늘은 남편이 가고 난 후 처음 맞는 제 생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카톡으로, 문자로, 페북으로 저의 생일을 축하해 주셨고, 남동생들과 여동생네 가족은 3일 전 아버지 팔순에 모였는데도 또다시 우르르 몰려와 고기를 굽고, 잡채를 하고, 떠들썩하게 축하해 주는데도, 가슴은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총 맞은 것처럼" 너무 아프네요.

딸아이가 아침부터 챙겨준 장미-결국은 여동생이 꽂아줌


그렇다고, 남편이 생전에 엄청나게 제 생일을 챙기거나 이벤트를 해 주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1 년에 반 이상을 출장과 훈련으로 집을 떠나 있었고, 돌아오면 밀렸던 부부싸움하느라 바빴으니, 기껏 건네주는 선물이라는 것은 선수단과 우르르 한인 면세점 가서 산 영양크림이나, 제 취향에 맞지 않는 향수, 스카프 정도였으니, 언젠가부터는 그냥 사 오지 마, 내가 내 선물 직접 살게 하며 그의 카드로 결제를 하고는 그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 모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진짜로 화가 났던 때는 결혼 20주년 때였습니다. 남편은 너무 바빴고, 결혼기념일이 1주일이나 지나서 들어왔지만, 그 해에, 만 15세짜리 딸아이를 대학에 최연소 입학시키고(물론 아빠의 경제적 후원과 딸아이의 노력과 재능이 큰 몫을 했지만), 결혼 20주년이니 그래도 기억을 했겠지 하며 내심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평생소원이 H사의 K 핸드백 한 번 들어보는 것이다 하고 노래를 부르고, 마침 유럽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라 저는 무슨 색깔을 샀을까? 큰 사이즈를 샀을까 작은 사이즈를 샀을까? 하며 드디어 출장서 온 남편을 만났는데, 어디서 어떤 이벤트로 건네줄지 3 일을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제가 먼저, 아니 나 선물 없어? 했더니 남편은 면세점에서 사 온 거 다 줬는데, 하더라고요. 술과 초콜릿 말이지요. 불안한 지 딸이 옆에서 '20주년, 20주년' 하며 쿡쿡 찌르더군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남편은, 아 왜 없어? 하더니 방에 가서 뒤적뒤적 커다란 다이어가 박힌 반지의 반쪽을 건네주더군요. 도대체 그런 다이어 반지를 살 돈도 없었을 테고, 다이어 반지에 반지가 완전한 형태로 있는 게 아니라, 알 부분만이 남았고 반지 부분은 없어서 이게 뭔가 했더니, "이거 내가 영국에서 어렵게 구했어" 하고 능청을 떨더라고요. 외국 친구들도 많고, 또 워낙 테니스라는 운동 자체가 고급 운동이라, 나도 모르는 영국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하는 친구가 있나 보다 하고는, 반지는 어쨌냐 했더니, 그건 저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며 얼버무리더군요. 늘 앞서가는 저는 아마 세관 걸릴까 봐 저것만 가지고 왔나 보다 하며 꿈에 부풀었습니다.

컴퓨터 자판만큼 큰 반지 전면


다음날, 이 다이어 반지가 2캐럿일까 3 캐럿일까 두근두근 하며 저는 압구정동의 보석집에 반지를 가지고 감정을 부탁했습니다. 반지 파편을 보자마자 감정사는 "아닐 것 같은데요" 하며 잘 들여다보지도 않고는 이거, 가짜예요 하고는, 이걸 어떻게 이렇게 자르셨어요? 하는 겁니다. 남편이 속았나? 이거 뭐지? 하고는 당장 전화로 남편을 다그쳤습니다.  그때 돌아온 남편의 변명은 기도 안차더라고요.


반지를 만들어 끼워도 이렇게 커요-금값이 더 나갈 듯


남편은 당시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와 함께 윔블던 메인 코트에서 연습을 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햇빛에 무언가 반짝하더랍니다. 그래서 들여다봤더니 그 반지 반쪽이 박혀 있더래요, 아마 누군가가 관중으로 오면서, 진짜는 금고에 두고 가짜를 끼고 왔다가 떨어뜨린 모양이지요. 윔블던 테니스 대회는 잔디 코트에서 열리기에, 매일 잔디를 깎는데 그 반지가 또 그 와중에 잔디 깍는 기계에 걸려 반토막이 된 모양입니다. 차라리 금으로 된 반지 반쪽을 주워 오지, 이거 진짜 다이아몬드인가 알아봐야지 하고 낄낄대며 지갑에 넣었다가 제가 선물 타령을 하니 현찰이라도 줘야겠다 하다가 반지가 보여 그냥 줬다는 겁니다. 이후 저희 집 분위기가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제 생일이 9월인데 한 1 월까지 말을 안 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저는 왜 그 반지를 18K로 세팅해 두었을까요? 지금은 제가 봐도 딱 가짜인 게 티가 나는데, 남편에게 받을 때는, "어머 이거, 진짜 오랜 된 건가 봐. 어느 집 유물 아니야? 옛날에는 세공법이 발달되지 않아 지금같이 반짝이지 않았거든"라고 부추겼던 제 자신이 진짜 창피하네요.

잔디코트를 유지하기 위해, 윔블던에서는 매일 잔디 깎는 기계를 돌린단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제게 중요했던 것은 그 반지의 가격이나 크기, 진위 여부보다는 그와의 추억이었던듯, 오늘도 꺼내 본 가짜 반지는 저를 웃음 짓게 만드네요. 차라리 남편이 차디찬 무덤 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면, 가끔씩 그가 있는 자리도 찾아가 푸념도, 원망도 해 댈 텐데, 저보다 더 좋은 천국에서 저를 내려다보며 저 반지 이야기 또 꺼낸다 하고 낄낄거릴 것을 생각하니 너무 얄밉네요. 차라리 다음 생일에는 생일 챙겨 줄 다른 사람을 찾아 약을 올려 볼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오늘 제 생일을 축하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제가 일일이 답글을 올리지 못해 이 글로 감사를 대신하려 합니다. 남편은 갔지만, 제 생일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친구들, 동료들, 선후배님들 그리고 가족들까지 있어서 더 행복하고 기억에 남는 생일이 된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친구이자, 동료이자, 남편이었던 고야 아빠의 자리는 늘 한구석에 남아 있겠지만, 저는 또 앞으로의 나날들을 그를 추억하며, 또 새로운 추억들을 저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과 함께 채워가며 천국으로 소환되는 그 날까지 열심히, 재미나게 채워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곱게 늙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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