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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BS는 방송국이 아니랍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희귀병 홍보대사: 우리 집 세 식구

길랑 바레 증후군을 아십니까? 척수에 균이 들어가 염증을 일으켜 말초신경부터 서서히 마비되는 병이랍니다. 줄임말로 GBS라고 한다네요. KBS 인줄. 이런 말을 하니 아니 바이올리니스트 아니야? 갑자기 웬 의학 지식 자랑? 하고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네, 저 음악 하는 사람 맞습니다, 맞고요, 제가 이 병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는 이유는 10개월에 혼자 서기 시작해서 돌 지나고부터 펄펄 날아다니던 저희 집 따님 최고야님께서 유학을 갔다가 이 병에 걸려 돌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멀쩡히 걸어서 비행기 타고 유학 갔던 따님을 사지가 마비된 상태로 모시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딸아이가 아프기 전, 저는 유방 외 파제트병이란 희귀병으로 치료를 마친 상태였고, 남편은 그때 막 원발성 심장 활액막 육종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았다가 다행히도 수술을 하고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좀 고요해질 것 같았던 제 일상은 미국에서 저의 옛날 교수님께 온 전화 한 통으로 다시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유방 외 파제트 병을 앓느라 대학원 입학시험 시기를 놓친 딸아이는 제 모교에 가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알던 많은 분들이 아직도 거기 계시기에, 딸아이의 이상을 눈치 채신 저의 옛날 선생님께서 저에게 연락을 하신 겁니다.


"유정아, 고야가 섭식 장애가 있는지 너무 말라서 걸음도 잘 못 걸어. 내가 병원에 좀 데리고 가고 싶은데 괜찮겠니?" 교수님 한마디에 저는 이건 또 뭐지 하고 갑자기 멍 해졌습니다. 고맙다고,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저는 한걸음에 미국으로 뛰쳐 갔습니다. 아빠는 항암 중, 엄마는 암 수술(피부암도 암이니까요) 받은 지 1년 좀 넘은 후, 딸아이까지 무너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를 계속 되뇌며 딸아이의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딸아이는 폐쇄 병동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키가 173이나 되는데 42Kg 이 돼버린 아이는 정말 뼈와 가죽만 남아 걷지도 못하고 간호원이 벨트 같은 것을 묶어 들고 벽을 잡고서야 이동을 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제 표정을 보고는 주치의께서는 자꾸만 애가 죽고 싶어 한다는 둥 집에 불화가 있냐는 둥, 애가 왜 못 걷는지는 이야기해주지 않고 질문만 던지셨습니다. 나중에 그 모든 이야기를 취합한 결과, 아이를 응급실에 데리고 가니 묻더랍니다. 왜 이렇게 말랐느냐, 공부가 힘드냐, 집에 무슨 일 있느냐 등등. 미국에서 태어나 교포인 아빠와 영어를 계속 쓰던 아이기에 의사소통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아이가 미국에서 산 건 0세부터 3세까지라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아이는 네, 집에 엄마 아빠 다 희귀병이고 아빠는 죽을지도 모르고 저는 지금 학기 중이라 가 볼 수도 없고 딱 죽고 싶어요. 매일 눈물만 나고 밥은 먹어도 자꾸 넘어와요를 영어로 자세하게 초진 의사에게 말한 거지요. 

여기서 잠깐! 미국에서 죽고 싶다는 말 잘못하면 큰일 납니다. 특히 저희 딸아이가 있던 동네는 전형적인 캠퍼스 타운으로 1년에 동양 학생들이 3-4 명씩 자살을 한다니, 이거 큰일 났지요. 게다가 매일 눈물만? 이건 우울증에 밥을 못 먹겠어? 그럼 이건 심각한 섭식 장애로 잘못하면 이 어린이가 죽을 수 있겠다 하고 초진 의사가 판단을 내리고서는 당장 24시간 감시가 되는 폐쇄 병동으로 입원을 시킨 거지요. 한국 사람들 죽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살고, 또 아빠가 진짜로 생사를 넘나드는 난치에 희귀병이라는 것 미국 의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게다가 갑자기 폐쇄 병동에 갇힌 저희 딸아이는 너무 기가 막혀 계속 나 여기 안 있어도 된다고 주장을 하니, 약을 먹여 계속 잠만 자는 상태로 데리고 있더라고요.

딱 기가 막히더라고요. 그래서 이리저리 설명하고, 부탁하고, 정말 온갖 쇼를 다해서 딸아이를 병원에서 탈출시키는데, 이상하게 벽을 잡고 걷던 아이가 점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거예요. 그래서 물었지요. 왜 애가 이러냐 했더니 너무 안 먹어서, 섭식 장애로 비타민 밸런스가 깨져서 그런다며 비타민 D를 처방해 주더군요.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지요. 미국 병원은 참 합리적이네, 서울 같으면 온갖 검사 다 했을 텐데 하며 애를 휠체어에 태워 서울로 데리고 왔습니다.



서울에서도 상황은 미국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항암 중인 아빠 대신 외삼촌이 데리러 나왔는데, 42Kg 밖에 되지 않는 딸아이를 저와 남동생이 끙끙거리며 차에 일단 앉히고 보니, 계단이 있는 가정집에 사는 저희 집으로는 도저히 데리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일단 집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피를 뽑고 엑스레이를 찍고 뇌를 찍고 뇌파 검사를 하고, 하여간 그 응급실에서 할 수 있는 검사란 검사는 다 하고서는, 따님은 특별히 입원할 만한 병명이 없다며 집에 가라 하더라고요. 딸아이는 절인 배추처럼 늘어져서 흐느적거리고 있는데, 병이 아니라니, 분명히 내 딸은 뛰어다니던 어린이인데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아무 병도 아니니 집에 가라고 하니 기가 막히더라고요. 말이 뇌를 스치기 전에 튀어나오는 스타일인 제 입에서 내뱉은 말은 아이가 죽고 싶어 했다고, 거식증 진단받았다고 정신과로 입원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은 정신과에 입원을 하라고 해도 안 하겠다는 보호자들이 태반인데 병원에서 저를 무슨 계모가 의붓딸 데리고 온 거 아닌가 하고 아래위로 훑더니, 겨우겨우 입원을 시켜 줬습니다.



정신과에 입원을 했으니 당연히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이 오셨지요. 너무도 친절히 너무도 많은 것을 물어보시기에 응급실에서는 기억 못 한 일을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14시간 비행시간 동안 화장실을 한 번도 가지 않더라고요. 물론, 화장실을 가려면 휠체어가 오고 어쩌고 해서 창피해서 그랬나 하고 넘겼는데, 하도 이것저것 물으시기에 생각이 난 겁니다. 주치의 선생님은 가끔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그럴 수도 있다, 아마 걸음걸이가 불편해서 방광이 늘어나 있어서 그럴 거다 하시며 소변 줄을 넣고 며칠 조절하면 된다는 식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게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저희가 서울에 도착한 날은 5월의 어느 긴 연휴의 시작 즈음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소변줄을 끼워놓고 딸아이에게 영양제 수액을 달아주고 혹시 모른다며 혈전제를 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동안 힘이 들었는지 아이는 계속 자다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그저 엄마가 데리러 와줘서 고맙다며 아빠가 보고 싶다고 울고는 또 잠이 들고는 했습니다. 갑자기 상황이 다급해진 것은 휴일이 끝난 아침, 전혀 나아지지 않은 방광의 상태였습니다. 딸아이는 여전히 요의를 느끼지 못했고, 온갖 과에서 와서 뇌부터 발끝까지 검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3일을 검사한 후, 갑자기 병원에서 딸의 척수액을 뽑아야 한다고 동의서를 내미는데 세상 느긋하고 긍정적인 저이지만 약간 무섭더군요. 아빠도 희귀병으로 투병 중인데, 이건 또 뭐지? 이제 이 아이는 걸을 수 없는 건가?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게 기가 막히더군요.



다음날 아침, 회진을 오신 교수님은 지금까지 봐주시던 정신과 교수님이 아니셨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교수님은 혹시 길랑바레 증후군이라고 들어 보셨냐고 물으시더군요. 당연히 모르지요. 저는 음악 박사이지 의학박사가 아니거든요. 신경과에서 오셨다는 교수님은 길랑바레 증후군에 대해 설명해 주시며, 보통은 호흡 곤란이 올 때까지 진단이 힘든데 다행히 소변줄을 차고 모니터링을 해서 아직 초기에 발견했다고 하시더군요. 그 순간 저는 또 하나의 병을 알아야 했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약 10만 명 중에 1~2 명 발생하는 꽤 많은 환자가 앓는 병이지만, 진단이 쉽지 않다는군요. 실지로 딸아이가 입원해 있을 때 지방에서 올라오신 30대 초반의 남자분은 시신경까지 마비돼서 불치라고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우연히 딸아이와 같은 병원에 오셔서 진단받고 치료받으시는데, 발견이 너무 늦어 딸아이보다 입원도 훨씬 오래 하시고 시신경은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6일 동안 시신이 썩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그가 길랑바레에 걸려 가사상태로 있다가 죽었다는 이론도 있고요. 게다가 치료도 비교적 간단해 5일 동안 주사 치료받으면 일단 더 이상의 진행은 없고 재활만 하면 된다고 하니, 주변에서 들은 너무 다행이라고 하시더군요. 네. 병명도 없이 사지가 늘어지는 딸아이를 보고 있는 것보다는 병명을 알고 치료가 가능하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아니 이게 뭡니까, 엄마는 유방 외 파제트 병, 아빠는 원발성 심장 활액막 육종, 어린이는 길랑바레 증후군. 우리 집안이 건강보험공단 희귀병 홍보대사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됩니까? 



이번 기회에 증상을 기억해 놓으세요!

기가 막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는 말만 귀에 들어오더군요. 딸아이는 일주일간의 치료 후 재활의학과로 전과되어, 공을 왼쪽 그릇에서 오른쪽 그릇으로 옮기는 것부터 시작해 한 달 이상을 재활 치료했습니다.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집에 너무 가고 싶다고 교수님을 설득, 2층 집에 돌아와 식사시간만 되면 층계를 앉아서 미끄럼 타듯이 내려오기 시작,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겨우 한 계단 올라가고 5분 쉬고 하면서 자기 말로는 "장충동 생활재활"했습니다. 저희 집에 환자가 좀 많아 딸아이 움직이는 게 불편한 것 정도는 네 스스로 하라 스타일이거든요. 완전히 재활이 됐다고는 하는데 가끔 너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을 좀 비틀거려 술 마셨냐는 오해도 참 많이 받았다고 하네요. 지금은 아직 발가락 끝의 감각이 살짝 무뎌질 때가 있고 하이힐을 신기가 좀 힘들다고는 하는데, 뭐 키가 173이니 그냥 하이힐은 패스하는 걸로.



왜 길랑바레 신드롬이냐고요? 길랑 박사님과 바레 박사님께서 1916년에 이 질병을 보고하셨다네요. 보통 감기나 장염 같은 것을 앓은 후 발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주 드물게 예방접종 후 발병하는 경우가 백만병에 한 명 꼴로 있다네요. 물론 제 딸은 1월 중순에 미국 학교에서 필요한 예방접종을 서울서 떠나기 전날 맞고 갔는데, 1월 말에 아빠가 심장암으로 진단받은 후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울기만 하면서 면역력이 약해져서 길랑바레에 걸리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지 말입니다. 길랑바레를 검색하면 서울대 희귀병 클리닉이 뜨네요. 엄마, 아빠 다 희귀병 걸렸으니 딸도 어디 평범하면 되겠습니까? 지난 일이긴 하지만 갑자기 화가 뻗치네요. 그 부녀는 왜 저를 이리 못살게 굴까요? 지금도 딸아이가 카드 결제하는 딩동이 들어오네요. 그래도 걷지 못하던 아이를 생각해내며 애써 참아보려는 엄마, 과부의 밤은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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