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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실금 먼저 암은 나중에

무식이 희귀병을 만날 때

무식은 언제나 용감합니다. 40대 후반으로 들어서며 바쁜 스케줄과 긴 출퇴근 시간, 잦은 폭식과 다이어트, 폭음 그리고 또 이런저런 이유로 저에게도 요실금이 찾아왔습니다. 누구에게 대놓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디펜드를 의지할 정도로 심하지도 않고, 팬티 라이너와 언제나 여벌의 속옷을 준비해 다니며 그럭저럭 견디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을 견디는 것은 또 다른 질환(?)을 불러왔습니다. 아주 민감한 부분이 심하게 가려웠고, 산부인과는 큰 스스럼없이 다녔기에 외용약을 처방받아 바르거나 약을 먹으면 조금 나아지곤 했습니다.






여하간, 그즈음 저희 친구들은 모이면 아주 자연스럽게 요실금 수술을 받은 이야기를 하곤 했고, 그 과정을 자세히 들어 보고 네이버 검색을 열심히 해 본 결과, 요실금 수술을 하려면 전신 마취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어깨를 수술할 때도 전신 마취가 무서워 수면마취해 주시는 선생님을 찾아가 전신 마취의 경험이 없는 저로서는 전신 마취라는 단어는 약간 무서웠습니다. 아는 병원에 가서 부탁해 볼까 생각도 해 봤지만 요실금 수술을 하면서 여기저기 부탁하기에는 약간 뻘쭘하더라고요. 이래 저래 언젠가는 해야 하는데 하던 저에게 절호의 찬스가 다가왔습니다.



겨울 방학이었습니다. 이리저리 보따리 장사 강사인 저에게 방학은 그동안 미뤄 두었던 건강 체크, 여행, 휴식 친구들과의 모임 등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때입니다. 시작은 사무실 앞 산부인과에서 시작됐습니다. 너무 오래 가려워한다며 산부인과 선생님은 저에게 큰 병원 피부과에 가보라고 권하셨습니다. 하지만, 산부인과의 영역을 피부과에 가서 보인다는 것이 무척 쑥스러웠던 저는, 다른 일 때문에 종합병원에 가면서 옆의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왜 오셨어요?"라는 처음 본 의사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생리대는 뭐를 쓰세요?" 하시며 별스럽지 않게 진료대에 올린 선생님은 상태를 보시자마자 "조직검사할게요" 하고 조직검사를 하셨습니다. 뭐 장이나 유방 같은 곳도 가끔 조직 검사를 하니까, 저는 그다지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속으로는 대학병원만 오면  조직검사를 시켜하고 툴툴 거리며 아무 생각 없이 다음날 가족들과 2주간 미국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다니다 돌아왔습니다. 시차 때문에 약속됐던 예약 시간에 결과를 보러 못 가고, 한 2 주 지나서야 또 다른 과랑 함께 약속을 잡아, 심지어 그 전날은 오랜만에 선배님들과 새벽 3시까지 와인과 담소로 달려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상태에서 오후 늦게 병원에 갔습니다, “그동안 어떠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심각하게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진짜 그 병원 처방약을 먹고는 괜찮았기에 훨씬 나았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선생님은 계속 심각하셨습니다. 진료를 하시고도 한참을 저를 앉혀놓고 이방 저 방을 오가시며 전화통화며 자료들을 보시더니, 드디어 선생님께서 입을 열기 시작하셨습니다. "파제트 병이라고 있는데 이게 보통 암 말기 환자들 한테 생기는 병인데, 굉장히 드물게 생기셨네요. 보통 70대 이상 암 병력 특히 유방암 병력이 있으신 분들이 마지막에 유방에 많이 생기기에 그 외의 다른 곳에 생긴 것을 유방 외 파제트 병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말씀을 잠깐 끊으시더니, "김유정 님은 연세도 어리시고, 다른 곳에 병력이 없으시니 크게 문제 될 것 같지는 않고, 그냥 혹시 다른 곳에 암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번에 검사해 보시면서 고급 건강검진한다고 생각하시고 치료받으시면 큰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그때 왜 저에게 "암" 이란 단어보다 "큰 문제없을 거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더 크게 들렸을까요? 멍청히 있는 저에게 선생님은 오늘 당장 입원하라고, 그래서 검사받고 빨리 수술하자고 하시더군요. 외국 놀러 갔다 온 후 계속 모임 때문에 미국 시차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저에게 당장 입원? 저의 얼빠진 모습을 보시고는 "이게 무슨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지만 지난 6개월간 갑자기 크기가 커졌고, 육안으로도 지난번 검사 때 비해 많이 커져서, 빨리 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수술은 간단하고요, 전신마취를 한 뒤........." 이때 제 머리에 박힌 것은 전신 마취였습니다. 전신마취? 산부인과? 그럼 요실금 아니겠습니까?

저에게 말씀을 끝내고 나가시는 선생님 뒤통수에 대고 저는 그럼 혹시 요실금 수술도 같이 해 주실 수 있나요?라고 외쳤습니다. 갑자기 얼음이 되시더군요. "어, 허, 저희 병원에서는 요실금 수술을 비뇨기과에서 하는데 방광암 검사도 어차피 해야 하니까 일단 여쭤는 보겠습니다." 앗싸! 이제 고통 끝,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세상이 오는구나 우하하하하하! 저는 그놈의 요실금 때문에 제가 그때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1도 생각 못하고 마냥 신이 났습니다.


병원에 간 그대로 입원을 했기에, 갑자기 친정엄마가 불려 오시고, 제 생각에 이게 약간 치질 수술 정도의 귀찮으나 위태롭지 않은 수술이라도 나름 정의를 내리고 게다가 나의 요실금까지 한꺼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고마운 수술이었기에 식구들 어느 누구에게도 심각하게 말하지 않았고 식구들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친한 선배가 그 병원에 계셔서, 전화를 드리고 심심하면 놀러 오시라고 했더니 갑자기 여러가지를 꼬치꼬치 캐물으시더군요. 왜 그러시나 싶었더니 그날 오후, 선생님께서 회진을 오셨는데 저에게 선배를 어찌 아냐고 물으시더니, 왜 말씀 안 하셨냐고 하시면서 무언가 다른 분위기더군요. 알고 보니 저의 요실금 구세주 산부인과 선생님은 제 선배의 학생 뻘 되는데, 그날, 생전 처음 그 스승님께 전화를 개별적으로 직접 받으셨다는군요. 웬 미친 아줌마가 자기 몸 상태도 모르고 저러나 했다가, 그래도 미친 아줌마 취급은 하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신 모양이지요? 뭐, 저의 병원 생활은 sns에 사진 찍어 올리기부터 밤에 옷 갈아입고 몰래 밖의 올리브영 가서 화장품 사다가 화장하고 있다가 수간호사 선생님께 혼나기, 친구들과 가족들의 스케줄 잡힌 면회 등등 너무 즐거웠습니다. 물론 방광경이나 유방암 검사 등 살짝 불편한 건 있었지만, 그래도 어딥니까, 나의 요실금이 구세주를 만났는데!





약 일주일간의 검사로 제 몸의 다른 부분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바야흐로 수술 전날, 요실금 구세주께서 마지막 회진을 오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곳에는 큰 이상이 없다, 하시며 수술 계획을 말씀해 주셨고, 마지막에 너무 어렵게, "이게, 산부인과 가 들어가서 떼어내고, 항문외과에서 체크하고, 성형외과에서 봉합을 해야 해서 혹시 앞의 것들이 시간이 많이 걸리면 요실금 수술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하시는 거예요. 아니 내가 무엇 때문에 입원을 했는데! 희귀병 수술한다 그러고(상당한 희귀 케이스랍니다, 제 케이스가) 요실금 고치러 누워있는데 말이 됩니까? 무슨 얘기냐고 펄쩍펄쩍 뛰는 제게 선생님은 "그래도 이게 질병 코드가 C로 시작 하는 병이라..."라시며 말끝을 흐리시더군요. C? Cancer의 C? 그럼 제가 암수술받는다고요? 했더니 "네 피부암의 일종이지요." 하고 회진을 끝내셨습니다. "암이라고? 암? 내가 암수술을 술 마시다 말고 병원 가서 입원하라고 입원해서 그냥 아무나 선생님한테 받는다고? 어디가 잘하는지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안 한다고 할까? 어쩌지?" 제 머릿속이 그리 복잡해져 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간병을 한다고 밤마다 병원 와서 치킨 시켜먹고 친구들 만나던 딸아이가 방에 "숨결이 바람이 될 때"라는 미국 엘리트 신경외과 의사가 척수암으로 죽어가는 과정을 써놓은 책을 쑤셔놓고 나가다니기에, 전 심심해서 며칠을 두고 어쩜 이리 운도 없을까 하고 눈물 흘리며 읽고 있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제가 불치병 환자가 된 것처럼 서럽고 슬퍼져서, 그 이후로는 물 한 모금 못 마셨습니다-어차피 12시부터 금식이기도 했고요.



다음날, 너무 복잡한 심정으로 수술에 들어가는데, 식구들께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지만, 이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가슴이 아프더군요. 그리고 전 수술에 들어갔고, 깨어났습니다. 무언가 모르게 불편하고, 목은 타들어 가는데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비몽사몽하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시더군요. "김유정 님, 요실금 수술했습니다! 잘 됐습니다." 죽어가는 저를 앞에 두고 선생님은 너무 자랑스러워 보이셨습니다. 구세주 선생님께 스승님의 전화 한통은 큰 부담이셨나 봅니다. 그저 내가 아끼는 후배다 잘 부탁한 정도로만 하셨을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제 은밀한 그곳의 암덩어리를 떼어내기 전, 요실금 수술부터 스케줄을 잡으셔서, 요실금 수술은 제시간에 끝나니, 그 이후 다른 과들이 들어간 겁니다. 입을 움직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선생님의 뿌듯해하시는 모습에 저는 목이 터져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외쳤습니다. 그 때 생각한 건 진짜 스승이 무섭구나. 평생을 선배 오빠에게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였습니다.






그 이후 어찌 됬냐고요? 저는 마무리 수술과 재건 수술까지 무사히 마치고 환자놀이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시켜먹다가, 1 년 뒤 정말 기도 안 막히는 희귀병으로 투병하기 시작한 남편과 골 때리는 희귀병을 얻어서 유학 갔다 돌아온 딸아이 덕분에 깨갱 하고 간병인을 했습니다. 스트레스로 살이 찌기 시작하면서, 수박 두 덩어리를 제 몸뚱이에 안고 다니는데도 마음대로 웃어도 되는 요실금 구세주를 만나 행복한 세상을 즐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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