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재능을 사랑했어요

로베르트 슈만의 사랑 이야기

음악에서의 사랑 이야기를 하자면, 슈만 부부를 빼놓을 수 없지요. 브람스까지 엮어, 세기의 사랑이다, 평생 클라라 슈만만 바라보고 산 브람스라는 등 여러 가지의 가설이 있지만, 사실 클라라와 로베르트 슈만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전에 시작이 됩니다.


schumannsandbrahms.jpg 슈만 부부와 브람스


독일의 츠비카우에서 1810년 태어난 로베르트 슈만은 출판업자인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여유롭게 자라며, 음악과 문학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슈만의 아버지는 음악에 재능을 보이는 아들을 당시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였던 베버에게 보내 음악공부를 시킬 예정이었지만, 아쉽게도 슈만이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남편이 죽자, 슈만의 어머니는 그가 앞날이 불확실한 음악보다는 법학 공부를 하도록 권유합니다. 1828년, 라이프치히 대학의 법학과에 입학한 슈만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꺾지 못하고 당시 라이프치히에서 기숙 피아노 학원을 하던 프리드리히 비크 교수님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됩니다. 어머니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계속 공부하기는 했지만, 음악을 너무도 사랑했던 슈만은 자신이 비크 교수님 제자로 몇 년만 연습을 하면 피아노 연주자로서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어머니를 설득합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되는 길은 험하고도 멀었습니다. 조기교육을 받지 않아 손가락이 둔했던 슈만은, 자신의 손가락을 훈련시키기 위해 기구를 만들어 훈련했다고 알려지는데, 이 훈련은 슈만의 손가락에 마비를 일으켜 피아노 연주가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결국 슈만은 피아니스트로의 길을 포기하고, 작곡가와 음악 비평을 하며 살기로 결심하고 음악 최초의 잡지인 "음악 신보"를 출간, 편집장이 됩니다.


clara1.jpg 어린 시절 클라라


슈만은 클라라 슈만 이전에 에르네스티 폰 프리켄이라는 비크 교수님의 제자와 사랑에 빠져 약혼을 하지만, 그녀가 사생아라는 게 알려진 후, 파혼하게 됩니다. 슈만이 처음 비크 교수님을 찾아갔을 때, 아홉 살이었던 클라라 슈만은 이미 피아노의 신동으로 많은 연주여행을 하고, 파가니니와 함께 연주할 정도의 대 스타였습니다. 슈만이 음악생활을 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클라라는 피아노계의 샛별로 주목받고 있었습니다. 슈만과 클라라가 사랑에 빠진 것은 클라라가 열네 살 때였습니다.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슈만이, 게다가 여자 관계도 복잡하여 매독이 걸려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도는 그런 학생의 자신의 딸이자 피아노계의 신성인 클라라에게 눈독을 들였다는 것을 알고 비크 교수는 대로했습니다. 여러 가지 협박과 소송을 걸었지만, 클라라와 슈만은 이미 미래를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결국 법정에서 스물한 살이 되면 클라라의 의지대로 결혼할 수 있다는 판결을 받고서, 스물한 살 생일을 하루 앞두고, 슈만과 클라라는 부부가 됩니다. 비크 교수는 끝까지 이 결혼에 반대해 두 사람을 보지 않았지만, 2년 후, 손자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화해를 하고 왕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schumann and wife.jpg

슈만과 브람스



슈만은 "음악 신보"의 발행과 작곡에, 클라라는 남편의 곡을 알리는 연주회를 여는데 전념하며 두 사람은 여덟 명의 자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꾸리는 듯했습니다. 슈만은 피아노 작품뿐 아니라, 성악, 기악, 교향곡, 콘체르토, 오페라까지 다양한 편성을 위해 작곡을 했고 그의 "음악 신보"에서는 슈베르트, 쇼팽, 브람스, 베를리오즈 등을 발굴하여 독일 음악계에 소개했습니다. 이제 슈만과 클라라는 아이들을 잘 키워내는 것만이 남은 듯했으나, 신은 이를 질투한 걸까요? 슈만이 이상한 환청이 들린다며 자신의 속에 두 명의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더니, 1854년에 급기야 라인강에 투신하며 자살을 기도합니다. 다행히도 지나가던 배에 구조되어 자살시도는 실패로 돌아가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조증과 울증이 교차되는 양극성 장애로 진단됩니다. 19세기 중반, 정신적인 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기에, 치료보다는 격리가 우선이었습니다. 슈만은 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부인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쇄약 해졌습니다. 2년 후인 1856년, 슈만은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brahms3.jpg 젊은 브람스

브람스가 슈만 부부를 만난 것은 1853년, 브람스가 스무 살 때였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킴(Joseph Joachim, 1831-1907)의 소개장을 들고 슈만 부부를 찾아온 브람스를 그들은 무척 환영했고, 그의 재주를 높이 사 "음악 신보"에 새로운 길을 열 작곡가라고 극찬했습니다. 슈만은 요하킴을 위해, 자신과 자신의 제자 알베르트 디트리히(Albert Hermann Dietrich,1829–1908)와 함께 F.A.E. 소나타를 쓰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슈만 부부와 친분을 쌓은 브람스는 1854년, 슈만의 자살시도 이후, 클라라의 근처에 살며 그녀를 대신해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을 도와주었습니다. 클라라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슈만의 면회도 브람스는 가능하여, 2년 동안 슈만을 돌보고 그의 안위를 살피는 것도 브람스의 몫이었습니다. 이런 면만을 보고 평생 브람스가 클라라를 흠모했다는 설화가 있지만, 클라라는 브람스보다 열네 살 연상에 일곱 명의 아이를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그다지 신빙성은 없어 보입니다. 브람스가 독신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브람스가 1859년 약혼했다가 결혼하지 못한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고, 브람스가 정작 사랑한 이는 슈만의 셋째 딸인 율리에였다고 하네요.

julia schumann.jpg 브람스가 사랑한 율리아 슈만


클라라 슈만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연주와 교습을 계속했습니다. 어쩌면, 별다른 유산을 남기지 못하고 떠난 슈만 때문에 생계형 연주자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라라는 바그너를 극혐 했고, 리스트와 같이 기교를 뽐내며 연주하는 것을 경멸했습니다. 그녀의 연주회에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그리고 가끔씩은 브람스의 곡도 포함하며 정통적인 클래식 음악의 전통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클라라의 존재는 보수적인 독일 낭만파 음악가들의 버팀목이자 대모가 되었다고 하네요.


schumannfamily1.jpg 클라라가 지켜낸 슈만 가족의 사진




keyword
이전 12화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멘델스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