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와 결혼했지만,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팜므파탈 알마 말러
한동안, 우리나라 음악계에서는 말러의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각 교향악단마다 말러의 아홉 개의 교향곡을 경쟁하듯이 연주했었지요. 대규모의 인원을 동원해야 하고, 긴 시간 연주를 해야 하는 말러의 교향곡들은 평소 음악회 프로그램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었으나, 이런 유행을 통해 전곡 연주를 하는 것이 당연시되기 시작했지요. 천인의 교향곡으로 불리는 말러의 교향곡 8번은 천명의 연주자가 무대에 서야 하기에, 기획 단계부터 연주자 섭외, 리허설 시간 정하기 등 많은 난관이 있는 곡이지요.
어쩌면 말러의 인생 자체가 쉽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보헤미안이자 유태인으로 태어난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부모님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말러의 교육을 위해 정성으로 뒷바라지해 주셨습니다. 말러의 아버지는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자, 말러를 비엔나 음악원의 교수님들에게 레슨을 받게 하고, 그가 비엔나 음악원을 입학하여 졸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비엔나 음악원을 졸업했지만, 말러의 부모님은 말러가 대학을 가기를 간절히 원했고, 이에 말러는 고등 교육기관인 김나지움을 다시 다니며 비엔나 대학에 입학하여 음악과 역사, 철학을 공부합니다. 이 경험은 후일 말러의 작곡생활에 큰 도움이 되게 됩니다.
말러는 작곡자라기보다는 지휘자로서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오페라 지휘에 재능을 보였던 말러는 지휘를 하며 모차르트, 베토벤, 글루크 등 거장의 음악을 익히게 됩니다. 평소에는 지휘를 하고, 여름휴가에는 작곡을 하며 자신의 지평을 넓혀나가던 말러는 여러 여성들의 구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일을 위해 연애는 미루어 두었다고는 하지만, 1889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을 한꺼번에 잃은 말러는 네 명의 남동생을 돌봐야 했습니다. 말러에게 자신의 사생활은 뒷전이고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지요. 이런 말러의 마음을 뒤흔든 여인은 작곡자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 1879-1964)였습니다. 알마는 풍경화가인 아버지와 그의 부인인 아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였던 알마의 아버지는 많은 제자를 남겼고, 알마의 어머니는 그의 제자중 한 명인 칼 몰(Carl Moll, 1861-1945)과 재혼했습니다. 비엔나의 현대 미술을 이끌어가던 몰은 많은 화가를 알마와 그의 어머니에게 소개해 주었고, 그중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알마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키스"라는 그림이 알마와 나눈 첫 키스를 생각하며 그렸다니 클림트의 알마를 향한 사랑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클림트를 거절하고 알마 쉰들러가 마음을 연 사람은 비엔나 음악원의 젬린 스키(1871-1942)였습니다. 그는 20세기 음악의 거장 쇤베르그를 비롯, 많은 학생들을 키웠지만, 정작 자신은 대표작이 없는 무명의 작곡가였습니다. 젬린스키에게 작곡 수업을 받은 알마는 곡 젬린스키와 사랑에 빠졌지만, 음악가로서 가능성이 없는 그와 헤어지라는 주변의 압박을 받았던 것 갔습니다. 젬린스키와 모진 이별을 한 알마는 곧 당대 최고의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말러의 구애를 받아들여, 알마 말러가 됩니다. 두 사람은 두 명의 딸을 낳고, 말러는 작곡에 전념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나 했습니다. 하지만, 말러의 큰 딸인 마리아가 병으로 어릴 적 죽으며 부부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게다가 말러는 이 즈음 심장병(감염성 심장 내막염)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말러는 자신의 병을 부인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해나가며 자신의 직장인 오케스트라에 적을 만들게 되고, 때마침 반 유대주의 사상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며 결국 비엔나 오페라 감독직에서 사임을 하게 됩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말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한 시즌을 지휘하지만, 토스카니니의 유명세에 밀려 다시 비엔나로 돌아옵니다. 비엔나에서 말러는 자신의 부인인 알마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에 크게 실망한 말러는 당시 정신질환의 전문가로 떠오른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와 면담치료를 허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 했습니다. 이후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선정되어 미국에 살던 말러는 자신의 지병으로 파리에 돌아와 혈청 주사를 맞는 등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알마는 결혼 중 바람을 피우던 건축가 그로피우스(바우 하우스 창시자)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와 연인이 됩니다. 7살 연하였던 코코슈카는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편지를 하고, 그림을 그려 보내는 등 알마에게 열심히 구애를 합니다. 하지만, 코코슈카의 끝없는 구애는 알마의 마음을 돌려버리고, 코코슈카가 세계 제1 차 대전에 참가한 동안, 알마는 전 연인인 그로피우스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이에 실망한 코코슈카는 실물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늘 함께 했었다니, 약간 오싹하시지요?
오스카 코코슈카
알마와 그로피우스와의 관계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로피우스가 군대와 집을 오가며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알마는 열 살 연하의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1890-1945)과의 연애를 시작합니다. 그로피우스와의 결혼 중에 베르펠의 아들을 임신한 알마와 그로피우스는 이혼을 하고 알마는 베르펠과의 세 번째 결혼을 합니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과 합병을 하자, 알마와 프란츠 베르펠은 미국으로 이주를 합니다. 베르펠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그의 재능을 발휘했지만, 아쉽게도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알마는 미국에 남아 예술계의 중심인물로, 사교계의 꽃으로 레너드 번스타인(1918-1890) 등과 교류하며 자신의 첫 번째 남편이던 말러의 작품을 알리고 홍보하는데 애쓰다가, 1965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의 시신은 18세에 세상을 떠난 두 번째 남편이었던 그로피우스와 알마의 딸, 마농 그로피우스의 무덤 옆에, 말러의 무덤과 가까이 안치되었다니, 알마 말러야 말로 진정한 팜므 파탈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