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결혼식, 한 명의 신부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일편단심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는 1900년대 초중반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연주뿐 아니라,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아름다운 로즈마린 등 주옥같은 바이올린 소품들을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1875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유태인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962년 미국의 뉴욕에서 사망할 때까지 90여 년을 바이올린과 살아온 크라이슬러는 그 긴 인생만큼 다양한 경험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신동 크라이슬러


크라이슬러의 시작은 신동이었습니다. 4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한 크라이슬러는 의사인 아버지에 의해 비엔나 최고의 선생님들과 만나 그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9세에 비엔나 음악원에 입학, 야콥 돈트(Jacob Dont)에게 바이올린을, 안톤 부르크너(Anton Bruckner)에게 작곡을 배우고 10세에 최우수 졸업을 합니다. 이 기세를 몰아, 파리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천재 소년은 램버르트 마사르트(Lambert Massart, 1811-1892)의 클래스에 들어가 12세에 파리음악원도 우등으로 졸업합니다. 승승장구하던 크라이슬러는 이 기세를 몰아 미국 연주여행을 시작합니다. 2년 여의 미국 연주를 하고 돌아온 후인 1889년, 크라이슬러는 비엔나 필하모닉 단원 오디션을 보아 연주로는 합격했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는 악장의 반대로 비엔나 필하모닉에 입단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에 좌절한 크라이슬러는 바이올린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며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의학공부를 시작합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군인으로 헝가리와의 전쟁에도 참전하며 바이올린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사나 했는데, 1899년,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콘체르토 솔리스트로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유럽 전역과 미국의 유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및 독주회를 열게 된 크라이슬러는 1901년 미국에서 유럽으로 돌아가는 배인 비스마르크호에서 자신의 평생 반려자를 만나게 됩니다.


크라이슬러와 부인 헤리엇 우어츠


해리엇 리에스 우어츠(Harriet Lies Woerz, 1869-1963)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1869년에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레드 우어츠(Fred Woerz)와 결혼한 해리엇은 곧 이혼을 하게 됩니다. 이혼 후 유럽으로의 항해 도중, 배 안의 작은 이발소에 모자를 고르러 갔던 해리엇에게 반한 크라이슬러는 곧바로 그녀에게 청혼을 합니다. 하지만, 유태인인 크라이슬러와 가톨릭 신자로 성당에서 프레드 우어츠와 결혼했던 경력이 있는 이혼녀인 해리엇과의 결혼은 그다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일단 1902년 런던에서 법적으로 혼인을 했습니다. 유럽에서 결혼한 부부는 1905년, 신부의 고향인 뉴욕 근교 호보컨, 뉴저지에서 한번 더 결혼식을 올립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던 크라이슬러 부부는 1947년, 첫 결혼식을 올린 후 45년 후, 해리엇의 전남편인 프레드 우어츠가 사망한 후, 성당에서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미 45년을 부부로 살았지만, 하나님이 축복해 준 부부가 아니었다는 것이 평생 마음에 걸렸던 듯, 70대의 노부부는 결국 성당에서, 추기경의 축복을 받는 결혼을 해내고야 맙니다. 이렇게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다니, 참 부러운 부부입니다.


젊은시절의 크라이슬러

크라이슬러의 가장 혹독한 선생님은 해리엇이었다고 합니다. 해리엇은 늘 "크라이슬러가 연습을 조금 더 했다면,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달고 다녔고, 크라이슬러도 언제나 "내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누리는 모든 영광은 해리엇 덕분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는군요. 사실, 1947년 성당 결혼식 6년 전인 1941년, 크라이슬러는 뉴욕에서 길을 건너다 트럭에 받히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사고로 크라이슬러는 머리에 큰 부상을 입어 머리뼈에 금이 갈 정도로의 중상을 입고 1주일 이상을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이 사고로 크라이슬러 부부는 장례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크라이슬러는 개종을 하고 성당에서의 결혼식을 하게 된 듯합니다. 1943년, 크라이슬러는 자신이 1914년부터 살던 미국의 시민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고의 후유증으로 크라이슬러는 연주가 힘들어지고, 1947년 시즌을 끝으로 정규적인 연주 활동을 중단하게 됩니다. 1962년 1월 29일, 자신의 87세 생일을 2일 앞두고 크라이슬러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음원 녹음중인 크라이슬러


오스트리아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나, 12세에 할례를 받은 크라이슬러는 가톨릭 신도가 되어 미국인으로 뉴욕에 안치됩니다. 크라이슬러는 굉장한 애국자로, 헝가리 오스트리아 전쟁에 어릴 적 참전했었고, 또 세계 제1차 대전 중, 오스트리아 군대에 자원해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입대하지만, 부상을 입어 상이군인으로 은퇴합니다. 1차 대전 이후 패전국인 오스트리아인으로서의 활동에 위협을 느낀 크라이슬러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합니다. 결국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고, 이후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됩니다. 3개의 국적과 2개의 종교, 60년의 결혼 생활은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기록인 것 같네요. 아, 그리고 의대를 다닌 것도요!


크라이슬러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남긴 업적은 후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그의 바이올린 작품들은 그가 작곡한 곡들도 아름답지만, 푸냐니, 타르티니, 비발디 등의 작품을 발굴해 그만의 스타일로 편곡한 것들도 많습니다. 영화음악과 뮤지컬, 그리고 극장음악들도 작곡한 크라이슬러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뿐만이 아니라, 작곡가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합니다. 그의 테크닉과 더불어 아름다운 소리는, 음반으로 남아있어 요즈음은 유튜브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로 재구성한 브람스, 파가니니, 베토벤 콘체르토의 카덴자들은 아직도 테크닉적으로 어려운 카덴자들로 악명이 높습니다. 끝없이 연주되는 크라이슬러의 곡들이 만약 그가 후계자가 있었다면 판권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겠지만, 불행히도 금슬이 너무 좋았던 두 부부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답니다. 크라이슬러보다 여섯살 연상인 해리엇의 임신 소식은 몇 번 전해졌지만, 불행히도 모두 유산되며 두 부부는 서로만을 의지하며 긴 세월을 함께 보냅니다. 1962년 크라이슬러의 장례식에, 그가 가장 사랑하던 해리엇은 아쉽게도 지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년여 후, 해리엇 역시 93 세이 나이로 그녀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남편의 뒤를 따라가며 그들의 결혼식과 남편의 장례식을 치른 같은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그의 옆에 묻히게 됩니다. 크라이슬러는 갔지만, 그의 작품들과 음원, 그리고 지고지순했던 사랑이야기는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따스한 사랑이 그리워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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