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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휘 Feb 19. 2023

명절 단상

밥상에 담긴 세상의 어려움

얼마 전 설날에 본가에 갔다.      


본가에서 명절 내내 세 끼를 먹으면서, 새삼스럽게 매 끼니마다 동물성 식품이 밥상에 올라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집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육고기는 없지만, 매일의 밥상에는 동물성 식품이 올라와 있었다. 멸치국물로 끓인 국, 명절이라고 부친 동태전과 해물동그랑땡, 계란물을 입혀 튀긴 오징어튀김과 쥐포튀김, 냉장고 밑반찬인 멸치볶음, 간식으로 먹으라고 꺼내주신 치즈와 요거트 등등. 익숙했던 이 밥상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이의철 의사의 <천천히 조금씩 자연식물식>을 읽고 있었기에 그렇게 느껴진 점이 있다.)평소처럼 이 모든 것들을 먹었지만, 이런 저런 생각과 감정이 더해졌다.     


동물성 식품이 과다한 게 아닐까? 언니는 가공식품만 먹고 밥보다 간식을 너무 많이 먹는데 문제가 있군, 냉장고에 냉동식품이 너무 많아, 후식으로 유제품 먹는 게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구나, 등등.....그런 생각들. 

    

이 밥상에 이상한 기분이 든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밥상이 ‘틀렸으니까 고쳐야 한다’고 말할 의욕은 없다. 뭐, 일단 다 내가 잘 먹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핵심은 관계 때문이다. 나를 생각해서 차려준 밥상에 불평을 제기하고 싶지도 않고, 또 식사를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시작될 논쟁도 귀찮고, 식사를 바꾸려면 누군가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나는 그 노력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 그냥 입을 다물고 받아 먹는 게 더 쉬운 방법이다. 나는 쉬운 길을 택했다.     


명절 중 하루, 부산에 잠시 놀러갔다. 바닷가에서 산책을 하고 점심을 먹으려는데, 관광지 바닷가가 으레 그렇듯 횟집만이 가득했다. 생선도 먹지 못하는 언니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하나도 없었다. 10여분을 그 일대를 걸었지만 정말, 횟집 외에는 편의점이나 카페 뿐이었다. 어쩌지? 엄마는 그냥 이 앞 식당에서 생선구이를 먹자고 했다.      

이 아름다운 바닷가에 식당은 횟집뿐이었다

이럴 때 보통 우리의 선택지는 앞의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시키고 언니는 밑반찬과 밥을, 엄마와 나는 요리(생선구이, 탕 등)와 밥을 먹는다. 내가 고깃집 회식에서, 또는 학창시절 급식에서 김치와 밥만 먹었던 것처럼, 언니는 밑반찬과 밥으로 끼니를 때우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종종 언니에게 해물을 먹어 보라며 ‘이건 냄새 덜 난다’ 하고 권하곤 했다. 

나 자신이 ‘고깃집에서 밥하고 김치만 먹는 건 안 불편한데, 제가 고기를 안 먹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더라구요’라고 말하고 그런 글을 썼는데도, 나도 언니에게는 ‘자기와 같은 것을 먹지 않는다고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날 부산 바닷가에서 적당한 식당을 찾아 10분쯤 걷고 난 다음, 나는 언니에게 “여기 파스타집도 있고 하니 언니 먹고 싶은 데 가서 알아서 먹고, 우리도 알아서 먹을 테니 이따가 다 먹고 연락해.”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와 나는 갈치조림 식당으로 가서 둘이 밥을 먹었다.     


몇 년 전 언니와 제주도에 갔던 생각이 떠올랐다. 바닷가 관광지에서는 같이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도저히 없어서 각자 알아서 먹고 만나자고 했다. (그 때 언니는 결국 편의점에서 구운 달걀로 끼니를 때웠다.) 제주 시내에서는 언니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아 파스타 가게며 인도 음식 등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나는 결국 짜증을 냈다.


아, 먹는 것은 이다지도 중요하고, 이다지도 사람을 옹졸하게 만들고, 이다지도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서로 배려하자는 말은 좋은데 나도 실천이 어렵다. 언니는 생선이 나오는 식당에 갔다고 불평한 적은 없다. 사실 나는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소수자들은 양보에 익숙하니까. 세상의 주류들(다수자들)을 비주류(소수자)가 배려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체화되어 있으니까. 나 역시 그런 상황에 익숙하니까.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 자신이 육식주의자들 세계에서는 ‘채식인’이라는 비주류(소수자)임에도,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나보다 더 비주류인(먹는 음식이 더 한정적이라는 의미에서) 언니를 무시해 버리곤 했다. 고민해서 답이 안 나올 때 가장 쉬운 방법은 무시이다. 나도 무시라는, 다수자의 방법을 택해 버린 것이다.      


이 작은 가족의 밥상 하나에 복잡한 세상의 어려움이 담겨 있다.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고민하다 결국 눈을 감아 버린 내 자신에 대한 씁쓸함을 곱씹게 되던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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