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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Mar 23. 2021

엄마  손잡고 아빠 손잡고 까까 사- 가지


어느 주말, 실내에만 있기 답답해 집 앞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아이에게 주섬주섬 옷을 입혔다. 요즘 부쩍 외투 입기 싫어하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까까 사러 가자~”하고 말했더니 순순히 옷을 입어주어 한결 수월하다 느꼈다. 속으로 ‘오 이 방법 괜찮은데?’ 생각하며 앞으로 유용하게 쓸 비법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특별한 목적지 없는 산책을 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일단 밖에 나오고 나서는 큰 길을 따라 공원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물론 아이에게 까까 사러 가자고 말했던 건 까맣게 잊은 채였다. 그렇게 한 500미터쯤 걸었을까, 말없이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작고 작은 입을 오물오물 움직여 “엄마, 손, 잡고~ 아빠, 손, 잡고~ 까까, 사, 가지~”하고 즐겁게 흥얼거렸다.     


그 순간, 잘 삶은 병아리콩처럼 동그랗고 다부진 아이의 머리 위로 남편과 나의 흔들리는 동공이 마주쳤다. 기쁨과 감격이 담긴 두 사람의 눈빛. 아이의 첫 문장 발화였다. 육아 19개월 만의 일이었다.  아이가 제대로 된 문장을 말했다는 경탄과, 그 문장의 내용이 엄마랑 아빠랑 손잡고 까까를 사러 간다는, 아이 기준으로 보면 아마도 가장 흡족한 순간일 거라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대강 둘러댄 말도 아이는 모두 듣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과 반성의 시간도 짧게 지나갔다.     


나는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채우며 “하늘이, 엄마 손잡고 아빠 손잡고 까까 사러 가요?”하고 물었다. 아이는 거품 방울 팡팡 터지듯 가볍고 투명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다시 그 문장을 말해주었다. 아아, 정말이지 그 길로 온 세상을 날아다니며 까까라는 까까는 몽땅 사주고 싶었다.     


최근 즐겨 보는 것 중에 <닥터앤닥터 육아일기>라는 웹툰이 있다. 공학 박사 아빠와 산부인과 전문의 엄마의 육아 일상을 담은 작품인데, 지금까지 내가 본 육아 만화 중 가장 유익하고 웃기다. 배꼽을 잡고 낄낄거리면서도 거기 나온 정보를 수첩에 적어두는 식이랄까. 게다가 거의 대부분의 좋은 콘텐츠가 그렇듯 재미에 감동까지 더해져 웃기다가도 또 막 울리고 난리다.     


아무튼 그 웹툰 155화에는 어린이집에서 샌드위치 만들기 체험을 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빠와 함께 참관 수업을 마친 아이는 바빠서 참석하지 못 한 엄마에게도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고 싶다며 하원 길에 재료를 사 온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어땠느냐 묻는 엄마에게 고사리 같은 손으로 다시 한번 조물조물 열심히 샌드위치를 만들어준다. 아이의 마음이 담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엄마 ‘닥터 안다’는 눈시울을 붉히며 남편 ‘닥터 베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끔 인생이 이렇게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무서워. 당신도 그래?


나는 그녀의 물음에 (비록 닥터 베르는 아니지만) 소리 내어 대답했다.      


“응, 나도 그래.”      


그래, 나는 아이가 “엄마, 손, 잡고~ 아빠, 손, 잡고~ 까까, 사, 가지~”라고 말했을 때 정확히 그랬다. 인생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어서 좀 무서웠다. 너무 행복해서, 이런 행복감이 처음이라 낯설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서, 그래서 두렵기까지 했다. 하늘에 대고 “인생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겁니까? 네? 이래도 되는 거냐고요!”하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참 그게 뭐라고.

엉망진창 샌드위치가 뭐라고.

뚝딱뚝딱 말 한마디가 뭐라고.      


아이를 키우다 보면 정말 별거 아닌 거 같은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잘 자도 행복, 잘 먹어도 행복, 잘 싸도 행복. 심지어 말 안 듣고 대들며 눈에 힘을 팍 주어도 ‘아이고 내 새끼, 자기 의사를 야무지게도 표현하네’ 싶어서 기특하고 행복하다.      


비록 지난하고 고된 일상에서 그런 순간들은 찰나의 불꽃같지만, 그 순간이 만들어내는 짧고도 강력한 빛은 침침한 일상과 다크한 눈 밑 살을 환히 비춰준다. 하루를 버틸 힘을 준다. 주고도 남는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꼬질꼬질한 몰골로 벌써 골백번은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실실 웃는다. 이 앓이로 새벽까지 울다 지쳐 자는 아이 옆에서 퀭한 눈으로 휴대폰 속 아이 사진을 보며 또 실실 웃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약간 기괴하고 무서울 것 같은 광경이지만, 진짜 행복해서 그러는 거다. 무시무시하게 행복해서!     








★ 이 콘텐츠는 온라인 육아전문 기업 <그로잉맘> 어플의 에세이 코너에 매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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