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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리 Apr 22. 2020

그야말로 침대 생활  

임신, 막달의 기록

 #1.10일의 입원이 깨닫게 해 준 사실


 임신 32주에 10일 동안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쌍둥이 임신의 경우 병원에 잠깐씩이라도 입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나에게도 입원이라는 에피소드가 생길 줄 몰랐다.

갈색 빛의 무언가가 속옷에 묻어 나와 병원을 방문했고, 검사 후 '바로 입원'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어떤 진통도 아픔도 없었는데 검사 결과 자궁에 수축이 일정하게 나타난 다는 것이 입원의 이유였다. 얼만큼 입원하고 있어야 할지 정해지지 않은 시점에서 병실은 다인실을 선택했다.


 6인실이었지만, 병실 자체가 넓어 침대와 침대 사이의 간격이 꽤 있었고 커튼이 한 침대마다 그 사람을 위한 개인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수납공간도 넉넉했고, 화장실도 병실 안에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불편했던 점이라면,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사연들이 어쩔 수 없이 입력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의 입원 이유와 가정사 등을 알게 되었는데, 분명히 이야기해두자면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6인실 병실 안에서 큰 목소리로 전화통화를 하여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 이야기 한 병실 내 사람들의 목소리를 차단할 방법이 나에게는 없었으니까.

 

 다양한 입원 이유를 가진 저마다의 사람들. 나처럼 자궁수축(조기진통)으로 인해 수축을 막고자 약물을 투여받고 있던 사람, 출산을 하고 몸을 회복하고 있던 사람, 너무 이른 양수 샘의 증상으로 누워만 있던 사람 등등이 있었고 그들의 병원생활은 나와 거의 비슷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임신을 이유로 생기는 위험요소가 많으며 이로 인해 입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임신을 하게 되면, 출산 때까지 중간중간 아기가 잘 크는지 확인하는 정기검진을 위해서만 병원에 오는 줄 알았다. 입원을 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듣거나 알게 되면 이는 정말 특별한 경우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나의 큰 착각이었음을 병원에 입원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임신 후 별 탈 없이 출산을 할 수 있는 건 큰 축복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고, 수축 증상 이외에 다른 아픔이 없는 내 몸에 조금이나마 감사했다.

 

시간별로 병실에 방문한 간호사는 맥박과 체온을 측정했으며, 수액이 잘 들어가고 있는지 확인했고, 사람들의 병명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약을 가져다주었다. 식사는 하루 세끼가 그야말로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 줄 것 같은 맛과 종류로 제공되었으며, 간식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중간중간 배고픔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처치를 받거나 식사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몸이 너무 무겁고 찌뿌둥할 때에는 복도를 몇 바퀴 도는 것으로 내 몸을 달래주었다. 그러나 이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던 건, 환자라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침대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기에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답답하고 지루한 병원 생활을 그래도 빠르게 보내기 위해서 말이다. Cho에게 집에 있는 책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혹 보고 싶은 책을 찾아 그 책을 사다 달라고 했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하루나 이틀 안에 한 권의 책을 무난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태블릿 PC는 케이블방송을 보도록 허락해주었다.

병원에서 보았던


#2. 퇴원 결정


 48시간 동안 투여하는 약물인 트랙토실이 나에게는 가장 잘 맞는 처방이어서 48시간 동안 약물 투여 후 자궁수축 검사를 하는 것이 반복되었다. 검사 시 수축이 나오지 않으면 퇴원을 할 수 있었을 텐데 4차 트랙토실을 맞는 동안에도 수축은 줄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기계에서는 자꾸 잡히는 자궁수축이 나에게는 어떠한 느낌도 주지 않았다. 배가 수축할 때 느껴지는 통증이 전혀 없었고, 나는 단지 요통만 가끔 느꼈다.

 입원 후 갈색 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기에 수축 기계가 나의 수축을 계속 잡아냄에도 불구하고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직접적으로 통증을 느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퇴원이었겠지만.


수축 검사를 할 때마다 제발 수축이 잡히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기계가 큰 파동을 주기적으로 그린다면 그것은 수축이 나타난다는 증거였는데, 검사를 하는 20분 정도의 시간 동안 나는 계속해서 기계를 힐긋 거리며 기계가 그리는 그림을 찾아보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 파동이 잔잔하면 안도를, 조금 크다 싶으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마음이 차분해지며 수축도 차분해질 거라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0일이란 시간은 길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것이다. 나에게는 무료함이 많았기에 길게만 느껴졌던 시간임에는 분명했다. 다음날 퇴원이 결정되고 나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집에 너무나도 가고 싶었기에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마음은 매우 긍정적이었고 조금의 행복함이 들기도 했다.


 퇴원 당일 아침 짐들을 정리해 가방에 눌러 담고, 진료비 수납을 했으며 Cho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한 일은 또다시 침대 위에 눕는 일.

병원에서 집으로 공간만 바뀌었을 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와도 같았다.


#3. 집 에서의 생활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병원에서와 같이 책을 읽거나 태블릿 PC를 통해 사지 않은 아기용품들을 쇼핑하고, 미처 보지 못한 드라마를 찾아보기도 했다.


 침대 위에 누워있을 때에도 나름 나만의 행동 규칙은 있었다.

식사를 한 뒤에는 침대 위에 바로 눕지 않고, 베개에 등을 기대어 조금이라도 소화를 시킨 뒤에 누웠다. 오른쪽으로 누워서 있다가 일정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는 왼쪽으로 돌아 누워 또다시 일정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정면을 바라보고 눕기도 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날 때에는 팔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침대에서 내려와 이동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튼살 크림을 발랐다. 아주 자주.

 이러한 행동규칙들을 반복하다 보니 일상이 되어 있었고, 그만큼 익숙해져 갔다.


 식사의 경우 같은 지역에 사는 엄마가 찾아오셔서 차려주었으며 오랜만에 엄마와 꽤 오랫동안 점심식사를 나눌 수 있었다. 퇴원 후부터 출산 전까지 평일에는 늘 엄마가 찾아와 주었다. 엄마가 해주시는 건강하고 맛있는 밥을 거의 한 달 동안 먹으면서, 우리 아기들에게 충분한 영양을 제공해줄 수 있었으리라. 그전에 시켜 먹었던 배달음식이나 대충 사 먹었던 끼니들이 아기들에게 그리 좋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남아있던 나의 죄책감을 싹 사라지게 만든 좋은 구실의 한 달이었다.

엄마표 김밥

 일어서거나 앉아 있는 시간도 좋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샤워를 할 때 접이식 높은 의자를 사용했다. 그 의자 위에 앉아 샤워를 하면 몸의 무거움을 조금은 덜 수 있었고 편안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손톱은 혼자 깎을 수 있었지만 발톱은 Cho의 도움을 받았다.

 집안일은 Cho와 엄마가 도맡아 주었으며, 미리 사둔 아기 용품들을 세척하고 세탁하는 일은 엄마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나는 정말 누워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태교들을 하면서.


#4. 막달. 내 몸의 변화


임신 초기에는 입덧, 두통으로 인해 고생을 했다면 임신 말기에는 몸이 무거웠다. 매우.

배가 많이 나와 몸이 무거워졌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증상들이 나를 괴롭혔던 것 같다. 그 첫 번째는 숨쉬기의 어려움이었으리라. 항상은 아니었지만 숨이 가쁘게 쉬어지는 횟수가 늘어났고 그럴 때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누웠다. 이상하게 왼쪽으로 누우면 숨 쉬기가 조금은 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렀고, 쉽게 배가 고팠다. 임산부는 조금씩 자주 먹는 게 좋다고 들었는데, 배가 많이 나와가면서 조금씩 먹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주 고픈 배를 위해 음식을 추가적으로 더 보충하진 않았다. 소화의 속도가 더뎌졌기 때문에 먹으면 답답함을 느낄 것임을 알아서였을까. 막달에도 나의 음식 섭취량은 임신 전과 다름없었다. 늘지 않았다.


 세 번째로 튼살. 32주까지 내 배는 원래의 내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배는 정말 풍선처럼 많이 나와 쿡 누르면 터질 정도였는데, 피부는 잘 버텨주었다. 그러나 32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 배꼽 위로 빨갛게 짧은 줄들의 튼살을 발견했다. 그리고 펑펑 울었다.

 튼살은 회복되지 않는다고 들었고, 그래서 예방이 중요하다고들 했다. 임신을 알자마자 튼살 크림을 꾸준히 발랐고 몇 통의 크림을 갈아치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튼살이라니.

 내 몸이 망가졌다는 생각에 눈물이 날 뿐이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조금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내 눈은 야속하게도 계속 옷에 감쳐둔 배를 훔쳐보고 있었다.

다행이었던 건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아 마치 상처 난 것 같이 빨갛던 부위는 며칠 지나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튼살크림은 고가의 크림으로 바뀌었고, 내 배에는 더 많은 크림들이 덕지덕지 발리기 시작했다.


 네 번째로는 가끔 씩 찾아오는 우울함. 아기를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부모가 된다는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이 찾아왔다. 벚꽃이 피는 따뜻한 봄 날씨를 창문으로 구경하며 간접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내 현실에 우울함도 드리워졌다. 이 감정은 일시적이었지만 매일 잠깐이라도 찾아와 나를 호르몬에 지배당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집앞에 핀 벚꽃


 막달. 이 시기만 잘 지나면 기다리던 아기를 만날 수 있음을 알았다. 내 몸과 마음의 변화가 찾아온 만큼 계절은 바뀌어 봄이 되었다. 예쁜 계절,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계절에 만날 우리 아기들을 기다리며 침대와 거의 한 몸 같은 생활을 했던 그 시기. 지금은 이 또한 추억이 되었다.

 시간은 멈춤이 없이 누군가 잡아당기듯 나에게로 끌려왔고, 아기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지금 과거가 된 나의 막달 기록을 남기는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그 흐름을 소중히 하며 아기들과의 시간을 보내야겠다. 비로소 엄마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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