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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미 선 Nov 26. 2023

조선남자 엿보기(6화)

그렇다고 굶어?

서울에는 딸이 혼자 살고 있어 가끔 간다.

이런저런 일들로 한동안 뜸했던 서울나들이를 결심했다.

딸을 만나는 것도 즐겁지만 두 번째 즐거움은 아무래도 밥상에서 해방된다는 거다.

딸에게 가면 무조건 다 사 먹는다.

모처럼 가사노동에서 탈옥했으니 나가서 만은  남이 차려주는 밥을 먹어보고 싶다. 


상경하기 전에 며칠 가출을 해야 하는 사람처럼 커다란 냄비에 김치찌개를 바글바글 끓여놨다. 

꺼내먹기 좋게 냉장고에 일목요연하게  반찬도 진열해 놓았다.

조선남자를 불러 세워 여기는 뭐, 저기는 뭐가 있다고 일일이 브리핑을 했다.

이 정도면 조선남자 아니라 고려남자라도 알아서  먹겠지.


반찬 꺼내기 싫으면 꼭 찌개라도  데워 밥을 먹으라고 부탁도 잊지 않았다. 

밥솥에는 울타리 콩을 풍부하게 넣은 밥도 충분히 준비해 뒀다. 

엄마가 집을 비우면 초등학생이라도 라면은 기본으로 끓일 줄 안다고 잔소리도 

양념으로 얹어두었다.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다.

딸과 만나면 맛있는 것도 먹을 것이고 연극도 보러 갈 것이다.

1박 2일이지만 알찬 플랜을 짜 두었다. 

신날 일만 남았다. 

칙칙폭폭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아직도 60년대 증기 기관차에서 헤매고 있는 중.)


그렇게 준비를 해두고 서울엘 올라갔겠다.

알아서 먹겠지 집 나와서까지 밥을 차릴 수는 없는 법.

나는 나대로  오랜만의 해방감에 수학여행을 온 학생처럼 글이나 집안일 따윈 잊기로 했다.  

밤에 잘 자라고 간단한 문자만 날렸을 뿐. 


그렇게 시시덕 거리면서 모녀는 맛집도 가고 연극도 보고 희희낙락했다.

이틀을  알차게 채우고 귀가를 했는데.

잉!

집에 와 보니 밥도 그대 로고 찌개도 그냥 있다.

하나도 건드리지도 않고. 

참나.

기껏 해놓고 갔더니 뭐냐.


밤이 되자 남편이 들어선다.

"아니 왜 밥을 하나도 안 먹고 그대로 뒀어?"

"....."

"왜 암말 안 해?"

내가 정색을 하고 쳐다보니 키키킥  웃어댄다.


"에휴, 굶었어."

"왜? 차려먹기 귀찮아서?"

"그게 아니고."

"왜 왜 왜 빨리 말을 해봐 봐."


얘기를 듣고  우습기도 하고 어이가 없다. 

일요일 아침에 처음 스스로 밥을  한 번 차려먹어 보려고 시도했단다.

찌개를 데우려는데 전기레인지를 켤 줄 몰랐다. 

뭘 잘못 눌렀다가 불이라도 화르륵 붙을까 봐 겁이 나더란다.


현대인 되기는 아직 멀었다. 

가르쳐주지 않은 내 잘못도 크다. 

배우려고 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다.

스스로 챙겨 먹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학습태만이다.  


전화로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알려줄 텐데.

아니, 가스레인지도 아니고 왜 불이 붙어. 인덕션이.

전기가 언제 겉으로 드러나기라도 하는가 말이다. 

그냥 반찬을 꺼내자니 씻기도 귀찮고 찌개만 데워서 거기다 밥을 말아먹고 말 생각이었다.

조반 준비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살도 찌고 있으니 이참에 다이어트나 하자.

그러고 점심까지 내리 굶었단다.

배가 훌쭉해지니 저녁만은 사 먹으려고 나갔다 들어와 보니 마누라가 돌아와 있다.


주방장은 남자가 더 많은 시대.

주방에 남편이 서성거리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세태.

남편이 가족들에게 멋진 요리로 서비스를 하는 요즘.

마누라가 어딜 가든 말든 걱정보다 오히려 더 편하게 발 뻗고 자는 현실.


이럼에도 21세기 한가운데 조선 남자는  아직도 조선인의 의지를 벗어내지 못하고 

이렇게 살고 있다.

조선남자 엿보기를 읽어본 독자라면  이 남자가 얼마나 조선시대를 

향유하고 있는지 알 거다. 

나는 남자네.

나는 돈 벌어다 주니 그런 건 안 해도 되네.

변함없이 시계는 조선시대에 머물러있다.


"이리 와봐요."

나는 그를 전기 레인지 앞으로 불러 세웠다. 

인덕션을 써보기 위한 실습이다.

냄비를 쓰려는 화구에 올리고  전원을 켜고 그다음에 화력 조절 숫자를 누르고.

깜빡할지 모를 때는 타이머를 맞춰두고. 

두 화구 중 하나를 꺼야 할 때는 0을 누르고. 

다 꺼야 할 때는 전원을 아예 꺼버리고.


"do you understand?"

"ok"

선생과 학생은 이렇게 레인지 수업을 진행했다. 

다음에도 레인지를 켤 줄 몰라서 밥을 굶는 일이 없길 바라며, 

선생은 학생의 어깨를 두들겼다.

생각 같아서는 두들기는 격려 차원이 아니라 팍 때려주고 싶었지만 어쩌랴!

돈을 벌어다 주는 지아비가  앓아누워 있으면 내가 굶을 테니. 


진짜 우리 집 냥반은 라면 봉지도 제대로 못 뜯는다.

한참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다가 다 부숴버린다.

만약에 내가 먼저 죽는다면  그는 부서진 라면이라도 먹고살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사후까지 책임은 못 진다.

AS는 없다. 

살아있을 때까지만 그를 위해 존재한다.


밥솥 작동법도 몰라, 전자레인지 돌리는 법도 몰라, 세탁기 돌리는 법도 몰라,

식기세척기 돌리는 것도 몰라. 

형광등 고치는 것도 몰라, 김치냉장고 여닫는 것도 어설퍼.

세상에 집안일에 대해서는  뭐 아는 바가 있어야지 밥을 먹든 깔끔을 떨든 할 것 아닌가.


그러면서 맨날 한다는 소리가  자기가  1년 먼저 죽을 테니 딱 1년만 혼자 살다가 오라나.

죽는 것까지 정해줘 아주.

저 꼭대기에서도 밥을 못 먹을까 봐 겁이 나는지 벌써부터 기간을 예약해 준다. 

씰데없이.


오늘도 내일도 오로지 내가 밥 밥 밥 밥으로만 보이나 보다.

내가 아프면 큰 일 난단다.

자기가 밥을 못 얻어먹으니까.

나는 이미 고장 나기 직전의 낡은 밥솥인데 말이다. 


나도 자유를 누리다가 가고 싶다.

밥 먹고 싶을 때 먹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 

그렇게 가르쳐줬건만  작동법을 까먹어서 밥을 또 못 먹었다고 하기만 해 봐라.

하늘에서 만나도 못 본 척할 거다. 




대문 사진 필자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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