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의 오아시스
누구나 젊은 날은 활기롭다.
친구도 많고 할 일도 많고.
싱싱하던 젊은 날이 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시간은 고장도 없고 쉴 새도 없다.
어느 날 오일장에서 쓰러져 있는 아저씨를 보았다.
인사불성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잠을 자고 있다.
어디서 막걸리라도 퍼 마신 듯 입가가 허옇게 말라붙어 있다.
그곳에 왕파리 한 마리가 애무를 즐기고 있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피해 가듯 아저씨를 조심스럽게 피해 갔다.
어떤 사람은 경멸의 표정으로 또 다른 이는 안쓰럽다는 투로.
아저씨는 길바닥에 누워 무슨 꿈을 꾸는 것일까.
아저씨는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면 차츰 사회로부터 입지가 좁아진다.
나이 드는 구조가 그렇다.
지인들이 줄어들고 다양했던 활동들이 축소된다.
벌어놓은 재산이 많으면 당분간 여행이라는 지루하지 않은 여가시간이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아저씨는 생활이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밖으로 한 발자국만 떼어도 다 돈이 소모되는 세상이다.
결국 가까운 산으로 한 나절 등산이나 다녀오면 하루 일과는 마무리될 때가 많다.
요즘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지자체에서 넉넉하게 문화센터를 개설해 놓았다.
거기도 가보면 다 아줌마들이 차지하고 아저씨는 소수다.
아저씨는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로 밀려나 버렸다.
노래교실도 기웃.
서예교실도 기우뚱.
수채화 교실도 갸웃.
이리저리 살펴봐도 전부 아줌마들 세상이다.
아저씨는 찬물 위에서 동동 뜨는 기름이 되었다.
이런 환경은 아저씨를 외롭고 슬프게 한다.
거기서 몇몇 안 되는 아저씨들을 만났다 해도 깊숙하게 유대관계를 맺기는 어렵다.
그것도 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돈을 써야만 유지될 수 있다.
결국 집안에 틀어박혀 할 일없이 TV 애시청자가 된다.
어쩌다 친구를 불러내 카페로 나들이를 나서보는데 거기도 아줌마들로 초만원을 이룬다.
거의 아줌마 군단이다.
아저씨들은 가뭄의 옥수수다.
"아니, 웬 여자들이 이렇게 많아."
전망 좋은 창가엔 다 아줌마들이 차지하고 수다잔치가 푸짐하다.
벽과 맞붙은 우중충한 자리에 터를 잡고 앉았건만 두 남자는 서너 마디로 화제가 소진되고 만다.
어색한 분위기에 애꿎은 커피만 홀짝거린다.
이럴 때는 풍부한 아줌마의 수다덩어리를 좀 꿔오고 싶다.
또다시 집으로 꿀단지를 찾아 들어왔건만 집안의 꿀단지는 어디에도 없다.
집은 적막강산이고 마누라는 보이지 않는다.
아저씨를 두 손 들어 환영해 줄 곳이 마땅찮다.
도무지 앞도 뒤도 꽉 막혀버렸다.
이런 아저씨의 전두엽에 반짝 켜지는 꼬마전구는 `내가 여태 뭐 하고 살았나.` 그거였다.
게다가 세끼의 식사를 얻어먹으려니 눈치가 촐랑대고 따라온다.
집에서 한 끼라도 안 먹으면 우수님.
한 끼를 먹으면 일식 씨.
두 끼를 먹으면 두식이.
세끼를 다 먹으면 삼식이 새끼.
세끼에 간식까지 먹으면 종간나 새끼.
집안에 종일 틀어박혀 세끼의 밥을 먹으면 이렇게 우스운 사람이 된다.
비록 우스개 소리라고 해도 언중유골이다.
게다가 본인이 차려먹는 것이 아니고 차려준 음식을 받는 입장이라면 `삼식이 새끼`라는
억울하고 천박한 처지가 되고 만다.
아저씨는 누런 배추 겉잎처럼 가치가 없어진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꾸만 슬퍼진다.
우울하면 어디 가서 실컷 울기나 했으면 후련하련만.
모르는 집 장례식장이라도 들어가 상주 친척을 가장하고 `아이고 아이고오.`
통곡이라도 하고 싶건만 그건 가당치도 않다.
울면 나약한 사내가 되고.
울면 줏대 없는 남편이 되고.
울면 자존심 무너진 자신이 된다.
이래 저래 남자라는 이유로 울면 안 되는 것이다.
울고 싶을 때 펑펑 울 수 없는 이 척박한 환경이 아저씨를 슬프게 한다.
가슴속이 막혀버린 하수구 같고, 밤고구마를 열개나 먹은 듯 답답하다.
그래서 찾아간 막걸리 집.
거기서 아저씨는 대낮부터 다리에 힘을 잃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속내를 혼자 털어내다가 끈 떨어진 갓처럼 뒹굴었다.
장터에서 뒹굴고 있는 아저씨의 현주소가 나이 든 아저씨들을 슬프게 한다.
노화는 어쩔 수 없지만 가치의 총량이 가벼워지는 건 어찌할까.
환경은 자꾸만 아저씨 편이 아닌 다른 쪽으로만 흘러간다.
게다가 젊은 날 아내와 자식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의 입장은 절벽에 서있다.
허우적거리는 남편을, 아버지를 인정해주지 않을 때 아저씨는 슬프다.
불판 위의 오징어처럼 몸과 마음이 오그라든 아저씨.
그토록 컸던 키도, 그토록 원대하던 꿈도 다 사그라들었다.
왜소해진 등에서 부서진 젊음이 저만치 도망치고 있다.
그것이 아저씨를 슬프게 한다.
아줌마들은 나이가 들어도 할 일이 많다.
살림이란 건 정년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 가서 소소한 용돈벌이라도 할 수 있다.
청소나 아이를 돌봐주는 것만으로도 아줌마 또는 할머니 역할은 열려있다.
여자들은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누구를 만나도 낯설지 않다.
아무 하고나 친하고 누구 하고나 어울린다.
노년이 되어도 외롭지 않을 확률은 할머니가 훨씬 앞선다.
아줌마들도 노년은 슬프되 아저씨들 보다는 덜 외롭고 덜 쓸쓸하다.
그것은 아줌마들 스스로가 여러 방면에 어망을 던져놓았기 때문이다.
날마다 작든 크든 고기를 낚아 올리는 재미를 아줌마는 진작에 터득해 두었다.
젊은 날 집안에만 처박혀 있던 아줌마는 이제 밖이 즐겁다.
여기저기 갈 데도 많고 친구도 많다.
아저씨는 오늘도 내일도 복장을 갖추고 화장을 하는 아내가 두렵다.
오후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다 전화선을 연결한다.
"아, 왜 자꾸 전화해. 차려놓은 밥이나 먹고 있어." 툭.
이럴 때 아저씨는 슬프다.
저물어가는 자신이 슬프고 알아주지 않는 가족이 서운하고,
아내마저 찬바람이 쌩쌩 휘몰아치면 갈 길 잃은 미아가 된다.
젊은 날 집안에 박혀있던 아내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때서야 아내의 마음을 줏어든다.
하루살이는 하루에 태어나서 하루만 살고 죽는 곤충이 아니다.
적어도 1~3년 동안 유충시절을 견디고 성충이 되어서야 하루만 살게 된 거다.
이것은 아저씨가 하루살이의 유충시절을 배제하고,
갑자기 하루 만에 죽어버리는 경우처럼 허무하고 쓸쓸하다.
이것이 오늘도 아저씨를 슬프게 한다.
그럼에도 아저씨의 머릿속에 유난히 쇼펜하우워가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쇼펜하우워가 한 명언을 아저씨는 곱씹었다.
요즘 쇼펜하우어가 뒤늦게 뜨고 있다.
젊은 날 플라톤과 칸트를 공부했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인정받지 못했던 쇼펜하우어.
그도 은둔을 통해 금욕을 실행하며 칸트의 삶을 모방했다.
철학사에서 그는 염세주의자로 찍혔으며 헤겔의 관념론을 반대하고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했다.
그의 사상은 실존주의와 프로이트 심리학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혼자 외톨이로 살면서 염세주의를 표방했던 쇼펜하우워도 한 때는 고독했고 비참했다.
그랬던 그가 요즘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현대인들의 고뇌를 이제야 자근 자근 풀어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에 힘입어 아저씨는 외쳤다.
"야! 그거다 그거."
"반전이다. 반전."
아저씨가 반전이라고 외친 그 말은 무엇일까?
방구석에서 이렇게 가치없이 시들기만 해선 안 되겠다.
나도 유튜브로 음식을 배워야겠다.
아저씨는 유튜브라는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역시 쇼펜하우워는 고독을 통해 살아남는 법을 아저씨와 연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