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뭐 있나
지난 2월(24~25)에 1박 2일로 홍성 남당항을 다녀왔다.
서산 아저씨가 갑작스럽게 네 쌍의 부부를 불러들였다.
요즘 `새조개축제`가 열리는데 자기가 한턱 쏠 테니 어서들 오라고 손짓을 했다.
부산, 울산, 대전, 서산, 서울의 열명은 그곳에 집합했다.
다섯 쌍의 부부는 남당항 식당에 모여 부모생신에 모인 형제들처럼 희희낙락했다.
식당 안은 입추의 여지없이 복닥거렸고, 각자가 쏟아내는 말들은 거대한 소음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남당항으로 몰려든 느낌이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사람은 북적북적 술렁이고.
새조개는 뜨거운 냄비 속으로 속절없이 풍덩거렸다.
살아있는 주꾸미도 접시 바닥에 빨판을 붙이고 용을 썼다.
뜨거운 물속으로 끌려들어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건만 허사였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은 그것을 뜨거운 냄비 속으로 욱여넣었다.
누군 죽어가고 누군 배가 부르고.
이 생의 모순덩어리가 식당에서 자연스럽게 연출되고 있었다.
배가 고팠는지 그저 먹느라 정신들이 없다.
생과 사의 철학적 고찰은 나중문제로 젖혀둔 채.
혼이 반쯤은 날아간 식당을 나와서 숙소로 들어간 곳은 펜션이다.
급작스럽게 날을 잡느라 호텔은커녕 그것도 누군가의 주선으로 겨우 잡은 방이라고 했다.
펜션은 규모가 작았지만 마당엔 바비큐 시설과 노래방도 갖추고 있었다.
이 브로맨스들이 술과 노래방을 지나칠 리 없다.
1층에서 드디어 딴따라가 시작되었다.
북이나 장구까지 갖춰진 노래방은 금세 세상 근심과는 거리가 먼 향락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아저씨들은 술이 들어가자 체면이고 뭐고 홀라당 벗어던졌다.
취기를 무기 삼아 아저씨들이 춤사위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연습해보지 않은 신작 발표회다.
신작은 막춤의 경지다.
등을 구부리고 팔과 다리를 심하게 떠는 아저씨.
고개를 상하로 세게 흔들어서 마치 고개가 고장 날 것 같은 아저씨.
북을 둥둥 치면서 동동구리무 장사꾼 흉내를 내는 아저씨.
엉덩이를 유난히 빼고 오리흉내를 내는 아저씨.
노래를 부르다가 고음에서 한 손을 높이 쳐들고 바들바들 떠는 아저씨.
다섯 명의 아저씨들은 개성도 다양하게 안무를 즐겼다.
드디어 남편이 마이크를 잡았고 그를 지원하는 북소리가 둥둥 울려 퍼졌다.
북소리는 노래를 음소거시켰다.
남편은 노래를 하면서 발길질로 북을 저 멀리 밀어버렸다.
구석으로 밀려난 북은 무안하게 멈춰 섰고 북을 치던 사람은 북채만 든 채 멍하게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일행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북소리를 밀어버린 아마추어 가수는 음정 박자에 신바람을 한껏 쏟아부었다.
천장에 설치된 꼬마전구들도 신이 났다.
아줌마들은 이 요절복통할 현장을 지켜보았다.
자기 남편이 마이크를 잡으면 유난히 그 아내의 박수소리가 커졌다.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음식들은 언제 다 먹을 건지 홍성의 그 밤은 실로 요란스러웠다.
타지에서 온 낯선 인간들이 고요한 남당항 앞바다를 뒤집어 놓았다.
홍성의 고요한 공기가 파장을 일으켰다.
그들은 나이 든 아저씨가 아니라 혈기왕성한 청소년들이었다.
자녀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아마도 이랬을 것만 같다.
"우리 아빠가 저랬어?"
"어머나! 아빠도 저런 면이 있었네."
"나이 든 어른들도 저럴 때가 있구나."
폭소와 경악을 금치 못할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저씨 다섯.
그들은 모두 사업을 한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CEO 들이다.
평소에는 근엄하고 말이 없다.
체면을 무척 중시하고 남들이 봤을 때는 점잖다.
그럼에도 다섯 명은 술에 취하면 `인생 뭐 있나` 이것이 그날의 모토다.
그들은 어려운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살아왔다.
처음부터 사업이 잘 되지도 않았으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봤던 사람들이다.
고지를 선점하기까지 인생이 무지하게 고달팠다.
그래선지 이제는 맘껏 재밌게 살아보자고 도원결의했다.
각자 자기 고장으로 초대하여 좋은 곳은 다 데리고 다닌다.
초대한 이는 아주 큰 대접을 들고 나온다.
통이 큰 아저씨들은 만날 때마다 지구가 기울어지도록 떠들어댄다.
특히 경상도 사람들은 목소리가 커서 그곳은 농성장이 되기도 한다.
억센 경상도 억양과 사투리가 무슨 말인 줄 못 알아들을 때도 있다.
한 나라 언어가 몇 개라도 되는 것처럼.
그토록 떠들썩하고 의리가 의리의리한 모임은 처음이다.
아저씨들은 이제는 그저 남은 인생을 죽도록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
그곳에선 일상 따윈 없다.
일탈이 목표다.
장소를 벗어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무한정 일탈을 꿈꾼다.
일탈이래 봐야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개성을 드러내는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것이 고작이다.
그랬어도 점잖은 가면을 벗어버린 그들에겐 크나큰 카타르시스가 아닐 수 없다.
단단하게 숨겨두었던 아저씨의 억눌림은 그렇게 드러났다.
그들의 억압된 감정들이 봉선화 씨앗처럼 사방으로 터진 날.
그 날 만큼은 튀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었다.
껍질 속에 감춰둔 그 어떤 것들도 다 퍼포먼스가 되었다.
잘 굴러가지 않는 사업체를 굴리기 위해 시지프스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던 아저씨.
주꾸미의 빨판처럼 뜨거운 물로 뛰어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아저씨.
이제 그들은 그것들과 격하게 이별 중이다.
그런 아저씨들의 욕구가 이 모임을 통해 과감하게 발산되고 있다.
아저씨의 춤사위는 그런 모든 것들을 대변한다.
젊은 날 사느라 허덕일 때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단어.
그 단어를 지금 애절하게 곱씹고 있다.
홍성의 밤은 일장춘몽을 새롭게 절감하면서 그렇게 깊어갔다.
이튿날 아침에 몰려간 식당에서 아저씨들은 밤새 어떤 쇼가 있었는지 시치미를 뗐다.
어쩌면 취기로 무슨 일을 벌였는지 모를 수도 있겠다.
그저 말없이 얌전한 자세로 복국을 먹고 있다.
일행 중 한 명의 부인이 "아휴! 어제본 사장님들이 아니네요."
그러자 식당 안은 별안간 웃음소리로 출렁거렸다.
평소엔 점잖은 젠틀맨이면서 동시에 피에로가 될 수 있는 아저씨들.
그들도 때론 나이를 잊고 경박해지고 싶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굴레를 잠시 벗어던지고 원초적 나로 돌아가고 싶은 거다.
시나브로 유년의 개울물에서 멱을 감듯 그렇게.
아저씨들은 깨방정 캐릭터로 변신하는데 무지무지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