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사격의 실패
글을 쓰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누군가 들여다보니 지인이다.
뭐하냐길래 "그냥" 있다고 했더니 안심이 됐는지 전화선이 길어질 조짐이다.
맨날 글만 쓴다고 하면 무슨 대작가도 아닌데 반감이 들 것 같다.
"그냥"이라는 말로 버무리니 글 쓰긴 중단이다.
그녀는 수다쟁이란 걸 알기에.
그녀가 전화를 한 것은 불만을 터뜨리거나 하소연을 할 때다.
오늘도 또 하소연 한 소절 끌려 나오겠다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엊그제 남편하고 대판 싸웠단다.
싸움의 요지는 남편이 변기에 소변을 흘려놓고 뒤처리를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내게도 남편이 그러냐고 물었다.
"그럼, 가끔 그렇지."
안 그런 건 아니기도 했지만 그런 일로 화가 난 그녀에게 공감의 표시로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말을 안 해서들 그렇지 그런 일로 다투는 일이 종종 있을 거란 얘기도 해주었다.
그녀의 들쑥날쑥한 심기가 조금은 사그라드는 게 보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동지를 얻은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그녀와 짧지 않은 통화로 부부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도 했고 그 덕에 글감을 얻었다.
남, 녀라는 신체적 조건이 다르다 보니 다툴일이 종종 있다.
특히 남자들은 자기가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는데 서툴다.
그것은 싸움의 불씨가 된다.
아줌마들은 대체적으로 살림을 관장한다.
그래서 아저씨들은 남들에게 자기 아내를 소개할 때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이 우리 집 내무장관입니다."
장관이라는 감투를 씌워주면서 아줌마는 하루아침에 고위직으로 승격되었다.
남편은 외무부장관, 아내는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말은 허울 좋게 장관이지만 집에서 하는 일은 장관 비서만도 못하다.
듣기 좋은 내무장관은 저기 저 높은 바지랑대 위에 걸쳐놓고 싶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도 없고 티도 없다.
생각보다 가사노동의 강도는 세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진 않지만 누가 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할 일이 많다.
가사노동이야 직책이 주부이니 좋든 싫든 그러려니 한다.
당연한 일 말고 아줌마의 미간에 밭고랑을 만드는 일이 바로 통화 내용이다.
조심 좀 하라고, 조심 좀 해보라고 부탁도 해보고 읍소도 해보았지만,
도무지 통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에 화산이 폭발했다.
그 마그마는 내게까지 흘러왔다.
아무리 깔끔하게 청소를 해놓는다고 해도 소용없다.
그림이라도 멋지고 소장가치가 있으면 몰라.
형편없는 그림을 지워놓으면 또 그려놓고 또 그려놓는다.
어떻게 하면 그림이 없어질까.
"자신 없으면 앉아서 눟던지."
소변이 엉뚱한 곳에 얼룩을 만들면 아줌마들은 이렇게 일갈한다.
"한 두 번 이래야 봐주든지 말든지 하지."
오죽하면 한쪽 화장실만 쓰라는 원칙이 성립된다.
양쪽을 다 쓰면 수채화를 지우느라 아줌마는 이쪽저쪽으로 동분서주해야만 한다.
이런 아줌마의 고충을 일찌감치 알아낸 Richard Thaler (리처드 세일러)의
이론은 참말로 기가 차다.
그는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사람답게 변기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변기 한가운데에 파리를 그려 넣음으로써 강압적이 아닌 Nudge (넛지) 개념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에 등장한 변기 속의 파리 한 마리.
그 재치에 남자들은 파리 한 마리를 조준하는 쾌감과 소변의 방향성에 전율했다.
그로 인해 못생긴 수채화를 20%만 그릴 수 있도록 만들었으니.
이것은 아줌마가 먼저 창안했어야 했는데 한 발 늦었다.
그랬어도 여전히 과제는 남아있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불완전의 끄트머리에서 아줌마들은 고민한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로 다투지 않을까.
어떤 방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키포인트가 될 것인가.
소문에 의하면 영화배우 최ㅇㅇ 는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본다고 했다.
아내가 매번 청소하는 고충을 덜어주기 위한 방편이란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편들이 그것에 반기를 든다.
"아휴, 남자 놈이 어떻게 앉나 앉길."
체면이 날름 앞장선다.
그렇다면 자신이 청소를 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청소는 외면하면서 체면만 중시하면 갈등은 소멸되지 않는다.
방향을 잃고 조준의 실패를 매시 경험하는 저 낭패감.
일부러 그런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아니다.
본인의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르셀 뒤샹의 소변기도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 1917'이라고 쓴 것을 작품이라고 출품한
뒤샹, 그것이 <샘>이라는 표제어를 붙이면서 파리 미술계는 발끈했다.
자신의 이름도 아닌 리처드 머트라는 무명작가를 가장한 이 작품 아닌 작품은
`저것도 작품이냐.`였다.
그것은 평범함을 벗어난 창의적 오브제였다.
뒤샹은 조준의 실패를 해결하는 관점은 아니었지만 변기로 인해 새로운 미술 사조를
창안해 내는데 골몰했다.
뒤샹이 변기를 개척의 용도로 사용했다면 아줌마들은,
아무리 부부라 해도 화장실 만은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다.
일일이 쫓아 들어가 참견을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아저씨들은 더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런 방법은 어떨까?
일단 조준 사격에 실패하지 않도록 노력 좀 해달라.
설사, 사격에 실패하여 그림을 그렸다 치면 즉시 청소를 해달라.
혹시 못 보고 그냥 나왔다고 지적당하면 다음부터는 꼭 뒷마무리를 잘해보도록 하라.
그것으로 인해 마누라가 곪고 있다는 것도 인지해달라.
이래도 저래도 실행이 되지 않는다면 마지노선이 움직인다.
각서를 쓰는 방법이다.
그림 한 점당 만원.
그림이 더 그라피티 수준이면 삼만 원.
사람은 돈에 민감하다.
모든 제약의 조건으로 벌금이란 제도가 생긴 이유다.
벌금을 문다고 생각하면 하던 짓도 안 하게 되어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부부가 이 문제로 자주 다투는 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튀지 않는 흡입력 좋은 소변기를 개발하든지.
앉든지.
집집마다 파리가 그려진 그림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든지.
다방면의 연구가 필요하다.
가정에서도 이렇게 머리가 아픈데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분들은 어떨까.
그 일은 몸에 사리가 여러 개 들어차야만 견딜 수 있다.
이렇듯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속으론 화장실이 앓고 있다.
두 개 세 개의 화장실이 모두 멀쩡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저씨들이여~.
이쪽저쪽 아무 데나 골라 쓰는 재미를 맘껏 누리고 싶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