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본 인간세상
나이 든 세대들은 어릴 때 고양이나 개를 밖에서만 길러봤다.
집안에서 함께 뒹구는 일은 그리 흔치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자녀들이 허락도 없이 고양이를 껴안고 집으로 들어오면,
기겁을 하고 소릴 지른다.
"쟤가 미쳤나 봐. 당장 누굴 주든지 갖다 버려. 어딜 집안으로 고양이를 들이냐."
(그렇다고 갖다 버리라는 건 좀 과하지)
고양이를 직접 키워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왠지 동물이 낯설고 무섭기까지 하다.
털 빠지는 것도 싫고 냄새나는 똥오줌도 싫고 `야옹`대는 소리도 싫다.
내 영역에 동물이 들어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방해하는 것도, 수발을 들어야 하는 것도 싫은 거다.
그냥 살던 대로 살 것이지 무슨 동물이람.
눈의 흰자위가 고양이에게 꽂히면서 당장 내쫓으라고 호령이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학교로, 직장으로 나가고 없는 텅 빈 집에서 고양이와 둘이 남게 되면
둘은 알게 모르게 눈이 맞기 시작한다.
그렇게나 보기 싫던 고양이가 왠지 불쌍한 생각이 들고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한쪽 구석에 가만히 눈치를 보고 앉아있는 불안한 고양이에게
"이리 와 봐. 이리 온."
먹던 고구마를 손바닥에 얹어놓고 고양이를 부른다.
이 길로 둘이는 연정으로 퐁당 빠져드는 절차에 착수하게 된다.
차츰 고양이가 자기를 향해 마음을 열고 애교를 부리고,
쫓아다니면서 관심을 보이자 `갖다 버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둘이는 죽고 못 사는
끈끈한 사이로 발전한다.
애초에 데려왔던 사람은 오히려 차순위로 밀려나고 싫다던 사람이 쥔장의 견장을 차게 된다.
왜? 둘이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으니까.
사람이나 고양이나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으냐 적으냐로 서로의 친밀도가 갈리게 마련이다.
이럴 때 데려온 딸이나 아들은 갖다 버리라더니 이제는 나보다 더 좋아하네.
파안대소로 돌변한 엄마가 마음을 열어준 것에 무지 안도감을 느낀다.
나 역시 지금껏 동물은 밖에서만 기르는 것으로 알고 살았다.
그런데 딸이 이사를 하면서 가 본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내 집이 아니니 상관할 입장은 아니지만 어떻게 키우려나.
걱정이 없지 않았다.
첫날은 장롱 속에 숨어서 나오지도 않다가 하루가 지나니 슬슬 나와서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누군데 여기 와서 저러고 있어.`
관상을 보더니 괜찮아 보였는지 내게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주방에 섰는 내 다리사이를 슥슥 문지르고 지나다니며 털을 내 바짓가랑이에 문질러 댔다.
`어! 얘가 내게 작업을 거네.`
"야! 나는 털이 싫단 말이다. 그러지 마."
생각은 그랬지만 말투는 한없이 사근거렸다.
그러니 고양이가 저를 좋아하는 줄 착각할 수밖에.
그날부터 나흘동안 나와 고양이는 서로를 익혀가는 사이가 되었다.
고양이는 생각보다 유순했다.
할퀼 줄 알았는데 할퀴기는커녕 좋다고 좋다고 자꾸만 나에게 눈짓을 해댔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하면서 바로 앞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는데 이것 참
싫다고 할 수도 없고.
`당신이 맘에 들어. 맘에 든다고.`
그러면 나의 관찰을 통해 이번에는 고양이가 본 인간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고양이가 볼 때 인간들은 자기들이 쥔장인 줄 착각한다.
꼬리가 긴 것도 아니고 털도 변변치 않은 주제에 뭔 쥔장.
나는야 늠름하게 꼬리를 치켜세우고 걸어가는데 쥐꼬리 만한 꼬리도 없으면서
뭘 나보다 우월하다고 그래. 그건 아니지.
인간들은 아침마다 검은 물 (커피)를 마시고 허둥대고 어디로 나가버린다.
그들만의 사냥터로 떠나는 걸 거다.
화살이나 총을 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네모 박스 안에 앉아 손가락 운동을 엄청 해댄다.
고개를 주욱 빼고 번쩍 거리는 걸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리고 혼자 인상 쓰고 혼자 웃는다.
아마도 큰 박스는 돈벌이할 때 쓰고 작은 액정(핸드폰)은 킬킬거릴 때 쓰나 보다.
작은 것과는 하루 종일 붙어산단 말이지.
그건 요술상자인가 봐.
집에서도 큰 박스(컴퓨터)와 작은 액정을 자주 가지고 놀아.
그럴 때 곁에서 `야옹` 해주면 "배고프니? 놀고 싶니? 화났니?"
이 세 가지 해석뿐이 못하는 바보다.
내게 있어 `야옹`은 존재의 선언이자 철학인데 말이다.
가끔은 인간들이 우울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 슬그머니 다가가 꼬리로 얼굴을 문질러준다.
그러면 그들은 웃는다.
참 단순한 존재인데 잘난 체는 오져.
인간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무엇이든 먹는다.
그들은 앉아서도 먹고 누워서도 먹고 걸으면서도 먹는다.
의자에 앉아서 빛나는 화면을 보면서도 먹는다.
한 손에는 늘 음식이 들려있다.
참으로 기이한 습성이다.
나 고양이는 조용하고 우아하게 식사를 한다.
사람의 떠들고 경박한 식사습관 보다 얼마나 엘레강스 한가.
고양이의 식사는 그래서 예술스러워.
천천히 냄새를 맡고 경계심을 놓지 않은 채 사뿐하게 식사를 한다고.
인간처럼 허겁지겁 삼키는 적이 없어.
그건 자존심 문제인 거야.
인간들은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면서 음식을 먹는다.
밥, 떡, 빵, 과자, 과일, 고기, 생선도 먹는다.
그야말로 온갖 잡것을 다 먹어치우는 잡식성이다.
음식은 꼭 여러 개를 펼쳐놓고 먹기 전에 깡통이나 병을 마구 흔들거나
김이나는 냄비를 보며 흥분한다.
나에겐 매일 똑같은 사료와 코딱지만 한 간식을 주면서 자기네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는단 말이야.
맨날 공정과 상식,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이건 아니지.
웃음은 또 왜 그렇게 헤퍼.
아무 때나 깔깔, 껄껄 아주 시끄러워 죽겠어.
뭔가를 먹고 깔깔, 마시고 껄껄.
소리가 어떻게나 큰지 그 소리에 나는 캣 타워 위에서 한숨을 쉰다.
정말이지 정숙이라는 개념이 없어.
정숙이는 옆집 애 이름인가 봐.
우리는 16시간 이상을 잠을 자야 해.
허구한 날 시끄러우니 언제 숙면을 취하냐고.
고양이는 특히 소리를 싫어해.
아주 작은 바스락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문은 왜 그렇게 쾅쾅 닫는지 자다가도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그건 그렇고 내가 낮잠 자는 창가에 제발 짐좀 쌓아놓지 마.
뭔 물건이 그리 많은지 생각 같아선 물어다 다 나눠주고 싶다고.
그래도 분노하지 않고 참아야지 어떡해.
나의 분노는 아주 조용하고 소박해.
새로 설치한 싱크대 밑을 발톱으로 세 번 긁거나 인간의 검은 옷 위에 내 흰털을
몇 가닥 뿌려주는 걸로 복수를 끝내.
고양이는 참는 법도 갚는 법도 인간들보다 더 잘해.
시끄럽긴 하지만 깔깔거리는 소리가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
인간들이 행복할 때 나는 그 기운을 느껴.
깔깔대고 웃으면 나는 귀를 뒤로 젖히면서 그 소릴 가만히 듣고 있어.
조금 요란스럽긴 하지만 참고 일부러 그들 옆에 가서 누워주기도 해.
등이라도 쓰다듬게 허락하면 그들은 금세 헤벌쭉 해지거든.
나는 이 집의 진짜 주인이야.
인간들이 그걸 모를 뿐이지.
내가 뭔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면 인간들은 이래.
"쟤가 귀신을 본 건가?"
어이없네.
귀신이 아니라 먼지를 본 거야.
아주 느리게 떠다니는 햇살 속 먼지.
인간들은 그게 잘 안 보여.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집안을 전속력으로 내달릴 때가 있어.
소파와 식탁을 튕기고 커튼까지 훌렁훌렁 젖히면서.
그러면 인간들은 또 이래. "하이퍼 모드야. 미쳤나 봐."
미친 거 아니야. 그건 내 삶의 한 방식이야.
고양이의 에너지는 고요와 폭발이 공존하거든.
침묵을 철학으로 엮고 순간적으로 전사가 되기도 해.
이게 내 핵심이거든.
고요한 연못인데 그 속엔 번개와 다이너마이트가 숨어있어.
나는 인간의 물건들이나 행동에 관심이 많아.
매일 다가가 냄새를 맡고 손가락을 핥고 그들이 펼쳐놓은 종이 위에 앉기도 해.
내가 인간들이 질색팔색 하는 키보드 위를 걷는 이유는 단순해.
쿨렁대는 것이 재밌거든.
때로는 그들이 울 때 나는 아무 말 없이 옆에 가 앉아있어.
위로는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온기로 하는 거야.
무슨 말을 하든 그가 전해준 말을 가만히 듣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아.
그것이 오히려 찐한 위로야.
아침이면 꼬리를 쳐들고 사람들을 배웅해 줘.
저녁이면 문 앞에서 기다리다 또 한 번 반가움을 표해주면
지쳤던 사람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아.
그러니 내가 이 집에서 거저 얻어먹고만 있는 건 아니지.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고 있어.
밤이면 가족들은 내게 눈인사를 해.
"잘 자 내 사랑스러운 고양이."
나의 응답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것.
`나도 사랑해.`
고양이는 새침데기야.
아무리 불러도 내 맘이 내키지 않으면 안가.
오히려 부르면 부를수록 외면하게 돼.
쌩 찬 바람을 일으키며 가버린다고.
그만큼 나는 아부나 맘에 없는 행동은 안 해.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관리 대상이야.
저건 왜 저기다 놨고 여긴 또 뭔 냄새야.
화장실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으면 나올 때까지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어.
"너 똥 잘 쌌니?"
그게 왜 중요한지 사람들은 민망해서 더 싫어하는데도 상관없어.
나오는 꼴을 봐야만 거길 물러나.
새로 사 온 이불은 먼저 올라가 차지하고 앉아봐야 돼.
실크인지 인견인지 요즘 유행하는 양모인지 내가 먼저 털을 좀 붙여두고 영역표시를 해야 하거든.
주인도 안 덮은 이불을 먼저 앉아보고 이 집 쥔장은 나다.
이러고 주제넘게 으스댈 때는 한 대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지?
그래도 때리지는 마.
(여기까지 고양이 생각)
첫 번째 갔을 때는 나흘동안, 이번에 두 번째 갔을 때는 삼일동안 고양이를 살펴봤다.
뭘 사 오는 것마다 가서 냄새를 맡고 뭘 사 왔냐고 참견을 한다.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좁쌀영감 같기도 하고 공사판 감독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비 오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본다.
그래도 심심하면 부엌 싱크대 위를 폴짝 뛰어오른다.
다른 건 몰라도 부엌 싱크대는 내가 질색을 하자 딸이 와서 고양이에게 말했다.
"너 당장 내려오지 못해. 거기 올라가지 말라고 했지?"
그러자 고양이는 골이 났다.
우리들 앞으로 오더니 등을 돌리고 앉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엉뚱한 데를 쳐다보고 누워서 마음속이 들끓는다.
딸이 알려준 고양이의 골 표현법이다.
그 모습이 더 우스워서 깔깔대고 박장대소를 했더니,
칫칫! 뭐가 우습다고 그래. 난 골이 났는데.
귀는 들쑥날쑥 눈은 흘끔흘끔 어찌 우습지 않겠나.
한쪽은 화가 나 있고 한쪽은 웃느라 볼일 못 보는 인간과 고양이의 이 기막힌 동거생활이.
나는 고양이 관찰자가 되어 고양이의 습성을 단기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오자 이제 가는 거구나! 표정이 시무룩하다.
가는 건 싫단다.
검은 바탕에 흰색을 둘러친 페르시안 고양이`백설`이는 참 용모가 단정하다.
그 애는 그렇게 나와 또 헤어졌다.
"또 올게 잘 있어."
말없이 눈빛만 애처롭다.
사람과 고양이가 한 공간에서 생사를 같이 한다는 건 서로의 따뜻한 곁이 필요해서다.
사람은 사람에게 얻은 상처를 고양이에게 하소연하고,
고양이는 말없이 그걸 들어주며 서로를 보듬는다.
꼭 말로 대화를 해야만 소통은 아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고양이와 개는 사람들 생활공간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것으로 새로운 생활패턴을 그려가고 있다.
그들이 없어도 평안할 수 있는 길은 요원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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