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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그게 뭐라니?(33)

해안길을 따라 인생도 흘러간다(1부)

by 김 미 선

지난 4월 29일 오전 10시 30분.

남편과 나는 보따리를 싸들고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부부가 4박 5일의 일정으로 세상 구경을 하기로 했다.


미끄러져서 뇌진탕을 당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여행은 큰 부담이었다.

여전히 두통이 심하고 제대로 진단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어딜 간단말인가.


그런데 내가 아프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리.

겉으로 혹만 부풀어 올랐을 뿐 타인의 눈에는 별로 심각해 보이지가 않을 테다.

두통이 있는지 멍한지 그걸 어찌 알겠나.

여하튼 아프지 않은 남편은 내 거부권을 구기고 손을 잡아끌었다.

호박잎만큼이나 큰 그의 손아귀는 내손을 거머쥐고 문을 힘차게 밀어젖혔다.


"나가서 바람 쐬면 다 나. 가자."

바람을 쐬고 돌아다니면 그것이 약이란다.

엉터리 처방전을 받아 들고 뒤따르며 중얼거렸다.

"밖에서 쓰러지면 난 몰라."

"알았어. 내가 책임질게."

(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책임. 중얼중얼)


이렇게 오래전에 예약해 둔 여행을 포기하자니 `앞으로 다신 안 데리고 다니겠다.`

으름장이 날아올 것만 같다.

맑은 마음보다 우중충한 기분으로 그의 발걸음에 박자를 맞추게 되었다.

부부싸움 후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데리고 다니겠다고 한 약속의 첫 실행이다.

이것은 다음 기회를 연장하는 첫 실험대 이기도 하다.

이래서 철딱서니 없게 혹을 매달고 길을 나서게 되었다.


첫 번째 행선지는 포항이다.

그곳을 향해 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양편으로 늘어선 산야는 연초록 물감을 푸짐하게 엎어놓았다.

자연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스케치를 감상하는 기분은 역시 방구석에 비할바가 아니다.


우리의 첫 행선지 포항 `라한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어놓고 주변 죽도시장을 순례하기로 했다.

숙소는 바로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 전망이 꽤나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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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내려다본 바다. 왼쪽 산등성이 환호공원.


바다와 가까운 죽도시장은 온통 해산물들의 향연장이다.

수족관의 해물들이 그렇게나 종류도 모양도 다양한 형태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크기나 무게나 대게가 대장이다.


거기선 아무래도 대게를 잡숴봐야지.

이 집 저 집 돌아보다가 결국 처음 구경했던 집에서 `박달대게`를 점찍었다.

상인의 말에 의하면 살이 꽉 차고 맛이 있다나.

1kg이 넘는 대게는 정말 살이 그득해서 금세 포만감이 밀려왔다.


집에서는 그렇게나 상감마마 행세를 하던 사람이 연실 게 살을 발라서

내 앞으로 내밀며 "많이 먹어. 아프지 말고 많이 먹어."

환자를 데리고 나선 책임을 먹는 것으로 보충해주려 했다.

아무튼, 어쨌든.

지지고 볶고 아프고 힘들다가도 이런 것들을 먹는 즐거움으로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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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하면 포항제철을 뺄 수 없고 먹거리 하면 죽도시장을 내칠 수 없는

이 고장만의 장점을 하룻밤 이곳에서 머물며 체험했다.

무리하지 않고 주변을 돌면서 소소한 것들에 취해보기로 합의했다.


숙소 근처에서만 돌다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것으로 플랜을 짰다.

이튿날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기로 한 곳이

환호공원과 스페이스 워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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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공원 내 스페이스 워크.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환호공원에 이런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구부러진 곡선이 보기만 해도 어지럽다.

무슨 용기로 저길 올라갔는지 중간도 못 올라갔을 때 바람이 마귀할멈처럼 심술을 부렸다.

공중에서 곧바로 땅바닥으로 내쳐질 것만 같다.


땅바닥은 괜찮게.

강풍으로 변하면 훌렁 바다로 던져질 것 같은 공포감이 밀려왔다.

인당수에 심청이가 되는 건 싫다.

난간을 붙잡고 허둥거리다 결국 우그러진 얼굴로 퇴행하고 말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저길 내려오면서 혼비백산한 얼굴로

땅을 딛고서야 깔깔거리고 웃었다.

작은 실바람에도 사람은 몸과 마음이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저런 설계는 일부러 공포증을 유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는지.


그곳을 돌아본 뒤 곧바로 영덕을 향해 가속페달을 밟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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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해수욕장, 영덕 해상산책로, 삼사 해상공원, 강구항을 지나다 보면 이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 전망대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던 곳인데 당분간 출입금지가 되어있다.

맞은편이 산불로 인해 시커멓게 소실되고 이곳도 나무들이 일부 누렇게 변해 있었다.

해안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끝없이 바다가 보였다 숨었다 숨바꼭질을 하는 멋진 곳인데.

20250430_115308 (1).jpg 영덕 도로변 산불의 흔적.

그 맞은편 산이 온통 까맣게 재가 되어 있었고,

한편으로 또 생명을 일으켜 세우려는 연초록의 작은 무리들이 희망을 일렁이고 있었다.

한 지역만이 아닌 영덕을 지나는 내내 보이던 산불의 흔적들이

마음을 복잡하고 아리게 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겠다.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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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의 이모저모.


그곳을 돌아보다가 울진 덕구온천을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몰려왔던지 시끌벅적하다.

긴 산골짜기를 따라 들어간 덕구온천은 주로 나이 든 세대들이 많았다.

따끈하고 미끈한 물에 몸을 담그려는 심산일 게다.


호텔 안에서의 물도 비누를 칠한 듯 일반 물과는 달랐다.

투숙객에 한해 무료로 티켓을 받았건만,

나는 온천탕을 거부하며 혼자 앉아서 청승을 떨 수밖에.

또 미끄러질까 봐 온천수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안전이 최고다.

이게 내 모토였다.

(여기도 또 깜빡하고 사진을 못 찍음. 멍~~)


식사 후 강릉을 향해 또다시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해안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누가 우리나라를 코딱지만 한 나라라고 했는가.

경상도에서 강원도까지의 길이 결코 코딱지가 아니었다.


아무리 유럽을 돌아다녀봤어도 이토록 우리를 감싸줄 땅과 바다가 어디 있으랴.

바다가 보였다 사라지는 이 길고도 아기자기한 도로를 달리면서

"우리나라 최고다."를 연발했다.

둘은 말이 없었지만 드넓은 바다를 한껏 마음으로 안아 들였다.


강릉이 숙소이긴 하지만 울진을 그냥 지나치긴 섭섭하다.

울진 `왕피천 공원`으로 가보자.

왕피천에 도착하니 바다와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으로 옮겨가며 바다도 보고 강바닥을 내려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강이 내려다 보이는 투명한 유리바닥을 짚고 서니 무섭긴 했다.

무섭다는 건 죽기 싫다는 거다.

겨우 살아났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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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에서 내리니 많은 사람들이 걸어놓고 간 소원 팻말이 수두룩 우리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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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소원 팻말의 공통어는 뭘까?

건강하자.

돈 많이 벌자.

성공하자.

합격하자.


대부분의 소원들이 거의 똑같았다.

어딜 가나 어디서든 사람들 마음은 대동소이하다.

그저 성공하고 돈 벌어서 잘 살자.

건강하게 행복하자.

그중에서 최고의 구심점은 역시 돈이었다.

팻말들을 훑어보면서 잠시나마 인간 심리를 탐구한 시간이다.


작지만 한 곳에 아쿠아리움도 있고 알차게 꾸며놓은 곳이라서

울진을 갔을 때 이곳을 꼭 가보라고 권장한다.

성류굴도 좋지만 이런 곳도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부담스럽지 않은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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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도 멋지고 알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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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에서 소개한 망양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문제들이 술술 풀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바람도 햇살도 풍경도 하나의 작품이 된다.

케이블카를 타고 왕피천을 건너서 이런 곳에 서게 되면 그날은

선비도 되고 사진사도 되고 역사학자도 된다.


여기까지 이틀간의 포항을 출발점으로 영덕, 울진을 경유한 여행기 1부이고,

다음 회는 삼척, 강릉, 속초를 돌아본 여행기 2부를 연재할 계획이다.

풍경과 글에서 잠시나마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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