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가 나를 불러냈다
지난 6월 10일 친구와 둘이 빈센트 반 고흐전을 다녀왔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엿장수가 아닙니다.`
`어서 와보세요.`
이렇게 고흐전이 나를 불러냈다.
올해 3월 25~ 6월 22일까지 길게 이어졌던 고흐전은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종결되었다.
`신의 눈빛을 훔친 남자`
오! 이 수식어가 딱 맞도록 고흐는 나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왜 이제야 오느냐고 타박이라도 하듯이.
`나도 벌써 달려오고 싶었지만 이렇게 늦었다오.`
`그래도 놓치지 않고 왔잖소.`
`우리 오늘만은 시대를 뛰어넘고 예술을 건너뛰어 친해봅시다.`
거장에게 말을 걸듯 나는 고흐 그림 앞에서 숙연했고 슬펐고 행복했다.
입장권에 나타난 고흐의 자화상은 1887년에 그린 그림이다.
생활고에 시달려선지 눈빛이 유별나게 날카롭다.
젊은 시절의 유순했던 사진과는 대조적이다.
환경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첫 번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9세 때의 고흐 모습.
고흐는 궁핍한 생활을 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던 건 아니다.
영국 왕실 사절사 미헬반 고흐의 후예였다.
한마디로 명문가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벤 튀스 (Anna cornelia, carbentus,1819~1907)는
헤이그의 부유한 가문에서 수채화 화가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목사였고 그의 큰 아버지는 잘 나가는 화상(畵商)이었다.
목회자의 길을 꿈꾸었지만 성격이 유순하지 못했던 고흐의 꿈은 좌절되었다.
교사생활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이래저래 방황하고 있던 그를 화가의 길로 인도한 것은 동생 테오였다.
화가의 길 또한 어둠이었고 그 어둠은 고흐로 하여금 더 그림에 집착하는
광기를 보여주었다.
"그림 그리기는 내게 일종의 구원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비참했을 거야."(1887년 여름)
그전이나 지금이나 예술의 길은 지난하고 험난하다.
37년의 짧은 생애동안 밝음보다 암울함이 그를 지배했다.
어둠이 있으면 새벽도 있을 법 하지만 그의 요절은 빛을 아예 차단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오늘날 그의 짧은 생과 고난의 행군을 보상해 주듯 전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는지 모른다.
고흐가 그토록 좋아했고 존경했던 렘브란트 보다도 더 광폭 행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수채화 화가였던 어머니의 재능은 훗날 반 고흐를 세계적 화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본격적인 화가의 신분을 유지한 것은 1880년~1890년까지 고작 10년뿐이다.
어둔 바탕 위에 빛으로 대상을 조명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과
두껍게 물감을 덧칠하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차용하면서 선묘법으로
자신의 화풍을 선도해 나간 그였다.
그러다 훗날 프랑스에서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의 캔버스 위에는 밝은 색감의
안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인상주의 화풍을 선호하진 않았지만 밀레와 들라크루아의 영향이
그의 생각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자연의 변화를 수긍하면서 농촌과 농민, 노인, 아낙들의 삶을 화폭 안으로 끌어들였다.
특히 단명의 아픔을 예고라도 하듯 90여 점의 자화상을 자주 그렸던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그림뿐 아니라 독서광이었던 고흐는 인문교양 부문에서도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편지 쓰기의 달인이었고 그것은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고흐의 심상과 그림의 흐름, 당시 화가들의 동향을 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872년 8월부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668통 과
모친과 누이동생에게 보낸 편지 235통을 합한 903통이 그것이다.
이를 근간으로 1995년부터 30년간 고흐 관련 학회지도 34편에 이른다.
편지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삶은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국내에서 발간된 단행본 만도 133권 째나 된다.
미술계와 학계의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해서 받고 있는 대단한 사람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고흐 관련 출판물은 한해 10여 권씩 발간되고 있다.
고흐는 전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특히 한국사람들에게 인기다.
1890년에 그린 꽃피는 아몬드 나무는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 형식을 밀린 화풍으로
동양적 감성을 풍부하게 발산하고 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동양풍의 그림을 그려내면서 한국인들에게도 친근감으로 어필했다.
전시관에는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에서 엄선한 진품 76점이 선을 보였다.
상당수가 직접 보지 못한 연필 드로잉까지 볼 수 있었으니 정말 가보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전시품들은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이곳에 공개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예술가의 삶이란 이토록 고달팠다는 것에 숙연했고,
생전에 고생만 하다가 사후에 빛을 보게 된 것이 안타까웠다.
그나마 사후라도 명성을 얻었으면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건만 누리지 못한 삶에
찡한 연민이 몰려왔다.
전시관 복판에 써진 문구가 무엇보다 내 마음을 흐리게 했다.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보다 더 많은 가치를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1888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남긴 어록이 그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한다.
생전에 <아를의 붉은 포도밭> 한 작품만이 판매의 전부였다.
먹고사는 것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야 그림이고 예술이고 심취해 보련만,
그런 상황에서 정신줄을 제대로 잡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동생에게 생활비를 얻어 쓰면서 죽어라 그림을 그려야 했던 고뇌가 전시실에 녹아있다.
그의 그림을 만나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인파를 보면서,
그는 역시 불멸의 화가라는 말이 옳다.
지금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서는 그가 벌어들이는 수입이 3조 원이 넘는다.
작가의 부재와 시간의 유한성은 더욱더 희소성을 부추기는 까닭이리라.
가슴속에 차오르는 분노와 절망을 위로해 줄 것은 오로지 그림뿐이었다.
보편적 삶이 내 팽개쳐진 자리엔 선구적 예술의 힘이 뿌리를 내렸다.
고흐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의사 가셰는 말했다.
"반 고흐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위대한 화가였다.
그는 인도주의와 예술이라는 두 가지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를 살아갈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그림이었다."
10년 동안 죽어라 화가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사회적 인정도 물적 안정도 받지 못하고
생을 자살로 마감했다.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은 누구와도 화합하지 못했고 가족들에게도 기피의 대상이었다.
조울증은 그를 더욱더 고립시켰다.
외골수 성격과 그림에 대한 집착만이 그를 명예로움으로 이끌었다.
동생 테오의 지속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1890년 불행한 삶을 마감했던 고흐.
그것에 죄책감과 안타까움이 더해져 동생 테오도 고흐가 사망한 지
6개월 뒤인 1891년 죽음에 이른다.
한 작가의 생에서 빚어진 얼룩무늬들이 어떻게 예술을 승화시켜 나갔는지
그 발자취를 더듬다 보니 어느새 출구에 다다랐다.
출구로 나오면 끝인 줄 알았더니 상품들이 진열된 전시실로 연결되었다.
책, 엽서, 우산, 양말, 액자 등이 고흐의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상품을 사는 걸로 봐서 이번 전시도 이래저래 대성공이다.
나도 두 권의 책을 사가지고 전시실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여기서 괜찮은 그림을 골라 모사를 해봐야지.
고흐 아저씨가 꿈에라도 나타나 뭐라고 하진 않겠지?
야무진 생각과는 달리 그림은 야무지지 못할지라도 시도는 값질 것이다.
상품 전시장에서 구매한 책.
<풀밭>
1887년에 그린 풀밭 그림은 신인상주의의 균일한 점묘법과는 다르다.
이 그림은 정밀하게 대상에 맞춘 고흐 특유의 붓질이다.
세밀하고 규칙적인 붓터치를 하면서 고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되든 안되든 이 그림에 꽂혀 나는 풀밭을 모방해 보기로 했다.
어림도 없겠지만 도전은 늘 발전을 도모한다.
도전은 성장의 향기를 몰고 온다.
풀밭을 그리겠다고 디테일을 따라 하다가 삼천포로 빠졌다.
고흐의 노련한 붓질에 놀라 풀밭이 꽃밭으로 변질되었다.
풀밭은 유명화가의 그림이고 꽃밭은 무명의 그림이라는 것.
그것이 분명한 경계선이지만 나는 고흐와 근거 없는 연대감으로 잠시 행복했다.
엉뚱한 꽃밭. oil on canvas. 25x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