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그림
그림은 혼자 놀기 딱 좋은 취미다.
어른이 데리고 놀기 좋은 장난감으론 최고다.
고독하지만 즐거움이 녹아있다.
글도 그림도 고독뒤에 맺어진다.
글은 활자로 그림은 시각적으로 섬세함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미세한 감정변화를 글과 그림에 반영하는 치밀함이 요구된다.
혼자 놀지만 생각이 늘어나는 시간이다.
붓에 세밀한 감정을 싣지 않으면 그림은 된박이 된다.
도공이 잘못된 도자기를 부수듯 찌그러진 그림에 남은 물감을 다 뭉개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기껏 그린 그림이 왜 이런다냐."
마음대로 그려지면 그림이 예술이라는 왕관을 쓸 수 있을까.
뭉개고 싶은 그림 앞에서 "난 아무래도 소질이 없나 봐. 그만둬야 할까 봐."
이러고 궁상을 떨다가도 다시금 붓질을 시도한다.
한 방면에서 종이(명함)를 내밀려면 미술을 전공하고도 수십 년은 연마해야
화백이라는 존칭을 받게 될 테다.
물감과 붓과 마음을 많이 버리면 버릴수록 그림이 익어간다.
하물며 그림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 방면의 고지를 점령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다가 생각했다.
그냥 잘 그리려 하지 말고 마음대로 그려보자.
나무와 꽃을 좋아하니 그들과 놀아보자.
이렇게 나는 꽃을 주로 캔버스 안에 심어주기로 했다.
꽃이 있으면 나비가 필요하고 벌도 꽃잎에 앉혀놓고 싶다.
어느 날 벌을 그리다가 파리를 그려버리고 말았다.
벌을 파리로 만들고 곱게 치장한 꽃잎을 뭉개면서 "너는 더 있다 부를게."
이래서 벌을 훠이훠이 내쫓아 버렸다.
이렇게 저렇게 그림을 그린답시고 흉내를 내다가 차츰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선물보다도 내가 직접 마음을 녹여낸 산물이라서 나름의 가치를 부여했다.
가치도 받는 이가 가치로움을 느낄 때 효용이 커진다.
받는 사람이 좋아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상대방에게 묻는다.
"뭘 그려줬으면 좋겠어?"
"해바라기."
사람들 마음은 십인십색 같아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건강을 바라고 부를 추구한다는 것.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들 대부분이 간곡히 바라는 염원이다.
돈과 연관된 것이라면 수영을 하다가도 뛰쳐나오는 인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바라기가 선호도 1위를 달린다.
풍수인테리어로 으뜸이라는 해바라기가 어쩔 수 없이 선두에 섰다.
그러면 해바라기가 그렇게 그리기 쉬운 그림이냐.
아니다.
보기엔 척척 획만 그으면 될 것 같지만 뜻대로 안 그려지는 게 해바라기다.
잎새 방향과 각도도 무시 못한다.
이러다 보니 조금만 비뚤어져도 해바라기가 시들거나 졸린 표정을 짓는다.
수채화는 밑그림이 있지만 유화는 대체로 밑그림 없이 그린다.
유화는 한 번 그리고 마르면 2차 3차까지도 작업할 때가 있다.
1차 건조가 끝나면 2차로 보완하여 완성을 향해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흡족한 작품과 만날 수 있다.
성급하게 쌓은 돌담은 쉽게 무너진다.
땀과 정성으로 결집한 모든 것들은 견고함 이라는 의리를 지킨다.
손끝에 모았던 유화를 건네줄 때 주는 이나 받는 이나 뭉클한 감정이 몰려온다.
주는 이는 주는 기쁨으로 받는 이는 고마운 마음으로 하나가 된다.
비록 명화도 아니고 화백도 아닌 사람이 그린 엉터리 그림이지만,
거기엔 마음이 웅크리고 있다.
손가락에 기(氣)를 모은 것이다.
어느 집으로 가든 그곳에서 그 집 분위기를 밝게 하고 가족들에게 행복감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성공이다.
집에 남아있는 그림들은 모두 2% 부족한 그림이고 날아가버린 그림은 좀 더 고급진 그림이다.
남에게 주는 것은 선정이 까다롭다.
그래야 마음이 켕기지 않는다.
그림은 같은 그림이라도 똑같은 그림이 없다.
아무리 같으려고 애를 써도 조금씩 다르다.
물감과 붓과 그 외 재료들이 서로 힘을 모아 그림이라는 한 축을 완성해 간다.
물감은 주로 시넬리에(프랑스) 윌리엄스 버그(미국) 밥로스(미국) 홀베인(일본)
외국산만을 고집한다.
오랜 전통과 기법으로 안료의 최적화가 이뤄진 고급 물감이다.
나 같은 엉터리가 마구 쓸 물감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제품들을 고집하는 것은 색감이 곱고 오래도록 변색이 없다.
특히 밥로스 물감은 내게 깊은 신뢰를 준다.
크림슨 레드와 화이트로 혼합된 꽃들은 한결같이 생화스럽다.
사진에서도 보이듯 밥로스 아저씨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미국 아저씨가 한 손엔 붓을 다른 손에는 파렛트를 들고 쓱쓱 붓질을 하면,
금세 나무가 그려지고 구름과 꽃과 계곡이 나타났다.
마법이다.
저 마법을 나도 따라 할 수 없을까.
호기심이 실천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돈도 시간도 필요했다.
생활에 그림이 끼어들 여유가 없었다.
사야 할 도구들이 많았다.
그러다 차츰 하나둘씩 도구들이 늘어갔다.
도구들을 늘려가면서 그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뭉개고 싶은 마음을 달래면서 완성을 향해 노를 저었다.
인생과 그림을 결부시키면서.
고배를 마시고 나면 사람이나 그림이나 성숙해진다는 것.
인생이 깊어갈수록 그림도 함께 여물어간다.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정사각형 해바라기 안에는 그렇게 인생이 오글오글 들어있다.
함께라면 외롭지 않아. oil on canvas.20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