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발목을 잡고
열흘은 너무 짧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그림 몇 점을 그려놔야 한다.
다섯 살 배기가 쿵쾅쿵쾅 돌아오기 전에.
아무래도 혼자보다 둘이 있으면 할 일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그렇다.
붓질을 하기 시작하면 왜 그렇게 시간은 더 빠른지 그 속도를 감당하기가 힘들다.
시간의 발목을 잡아 걸어두고 싶다.
금세 점심이 되고 저녁이 된다.
하루 문은 정말로 너무도 빠르게 닫힌다.
그림을 그릴 때는 공사장 페인트공 보다 더 추레하다.
앞치마를 하지 않은 날은 바지에도 소맷자락에도 물감이 제멋대로 찍혀 다닌다.
집에서 입는 옷들이 뻘겋고 노란 무늬로 새로운 염색패턴을 창조해 낸다.
한 번 굳으면 아무리 빨아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얼룩무늬다.
소뇌가 덜 발달했는지 붓은 수시로 내 발등을 찍기도 한다.
양말까지 유화스럽다.
그림을 그릴 때는 머릿니가 꽉꽉 깨물어도 모기가 물어뜯어도 머리를 만질 수 없다.
손가락에 페인트칠이 범벅되어 그걸 닦고 나면 이나 모기는 벌써 한 탕 치고 도망갈 테다.
어디 이뿐이랴.
전화도 혼자 울다 울다 지쳐서 끊어지고 만다.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거냐고`
항의 문자는 한참 후에나 들여다보게 되니 상대방의 씩씩 거리는 소리도 식은 지 오래다.
그림은 이렇게 완전히 무인도에 나를 구겨 넣고 하루가 시작되고 마감된다.
밤 10시가 넘으면 맞은편 집들이 하나 둘 불이 꺼진다.
나도 중단하고 자고 싶다.
누가 뭐라지도 않건만 왜 이리 나를 들볶아 대는지 당최 모르겠다.
유화는 그림을 준비하는 과정도 복잡하다.
물감, 붓, 캔버스, 파렛트, 나이프, 기름, 석유, 휴지, 리퀴드 젯소까지 주욱 늘어놓고 난전을 벌인다.
그림을 마칠 때도 붓을 석유에 세척하여 바셀린을 발라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굳어서 사용할 수 없다.
손에 묻은 물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주방세제로 때를 밀어내듯이 박박 닦아야만 겨우 흔적을 지운다.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피곤은 쌓이고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마음이 그래선지 그림은 절름발이가 된다.
동그란 모형을 그려야 하는데 세모가 되고 세모를 그리려 하면 동그라미가 된다.
유화는 하다가 망가지면 아예 다 지워버리든지 끝까지 완성하든지 둘 중 하나다.
피곤한데 내일 해야지 하고 찌그러진 그림을 내치고 잠을 자면 이튿날 그림이 울고 있다.
하루 만에 건조되는 건 아니지만 꾸덕거리는 상태로는 덧칠을 할 수 없다.
완성하기도 곤란한 상태로 다음 작업이 여간 피곤하지 않다.
차라리 종이라면 그냥 버리면 될 것을 캔버스는 맘에 안 든다고 버릴 수도 없다.
이러니 큰 맘먹고 그림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아무도 없을 때 아무 일도 없을 때 작업은 뭉근하게 갈비탕을 우리듯 우려내야 한다.
누구의 간섭도 참견도 없이 심야까지 홀로 붓과 물감이 나와 합심한다.
그렇게 그린 그림은 맘에 드는 사람에게 선심을 쏜다.
별거 아니라는 내 말 위에 겹쳐지는 건 상대방의 환한 얼굴이다.
"와! 이쁘다. 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정말 고마워."
그 한 마디에 나는 고단함과 이별이다.
무엇이든 너무 많으면 질리는 법.
우리 집 남편은 그림이라면 거들떠도 안 본다.
모처럼 괜찮은 작품을 그려서 코앞에 들이대고 "이쁘지?"
이렇게 물어보면 십중팔구 "아이고 배고파 밥이나 줘." 이런다.
당장 돈이 들어오길 하나 배가 부르길 하나 아무짝에 쓸모없다.
그러면 나는 혼자 삭인다.
`내 사후 이 그림이 얼마 짜리가 될지 아무도 몰라. 고흐도 그랬잖아.`
그리곤 혼자 또 실소로 마무리한다.
밥과 빵을 위해 업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서 오히려 덜 들볶인다.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면 이 그림이 오늘 팔리려나 내일 팔리려나
스트레스 덩어리가 될 것이다.
노동의 대가는 어떤 때는 기쁨으로 어떤 때는 실망으로 나를 웃게도 울게도 한다.
어떤 일이든 다 순서가 있고 완급이 있다.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날은 틀림없이 그림이 뒤틀린다.
마음이 급해서다.
차분하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해야 그림도 나를 대우해 준다.
세상 어떤 일이든 정성이 준비되지 않은 일엔 빈틈이 있게 마련이다.
불안하지 않고 느긋한 마음, 그것이 붓끝에 전해져야 비로소 그림이 그림다워진다.
만사는 마음이 얼마나 머물렀나에 따라서 성과가 달라진다.
내 그림은 먹사니즘도 아니고 죽사니즘도 아니다.
그냥 시간 날 때 천천히 그리면 된다.
그래도 모처럼 나만의 시간을 그림과 마주했다는 것에 감정을 모았다.
이제 우리 집 다섯 살 배기가 돌아왔다.
흑인이 되어서.
당분간은 물감과 붓들에게 휴식이 주어지겠다.
다음에는 한달살이를 하고 오라고 등 떠밀어 보내고 작정하고 앉아서 그림과 놀아야겠다.
무엇을 하든 자기만의 재미와 열정을 모으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일 거다.
너랑 나랑. oil on canvas. 20x20
실물은 화사한데 사진은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