姑婦(고부) 그게 뭔데요? (5화)

어머니 마음에 새겨진 것들

by 김 미 선


어머니는 젠장, 넨장, 옌장 3종 세트만 잘하실까?

아니다.

된장, 간장, 고추장 3종 세트도 달인이시다.

우리네 한국식 요리에 3종 세트가 빠지면 그건 한강에 소금 한 바가지 넣은 것처럼

밍밍하고 맛이 없다.

그만큼 장류는 우리네 생활에 필수품이고 주부의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새댁시절에 부엌 뒤 장독대에 숨어서 킥킥거리던 그 장소가 앞마당으로 이전했다.

집을 새로 짓고 구조 변경을 한 것이다.

어머니는 그곳에 해마다 떨어질 새 없이 장을 채우셨다.

어머니의 장독 사랑은 대단했다.

어디서 구매해서 어떻게 배달되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장독수는 나날이 새끼를 치면서 늘어갔다.

갈 때마다 더 크든가 더 작든가 옹기들이 지네들만의 집성촌을 이루면서 대가족을 이루었다.


키가 크고 뚱뚱한 독에는 항상 시커먼 간장이 담겼다.

간장독 옆엔 간장 마누라 된장이 자리했다.

된장독 옆엔 그 보다 앙증맞은 고추장 항아리가 앉았다.

고추장 항아리는 유난히 반짝거렸다.

3종 세트는 어머니의 젠장, 넨장 다음으로 아끼는 식재료다.


길고 좁은 새우젓 독들도 3종 세트 안에 꼽사리를 끼고 앉았다.

어머니가 아프실 때 이젠 된장, 간장, 고추장은 끝이란 걸 직감했다.

진작 어머니표 장류를 배워두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누구의 간섭 없이 혼자 사셨다.

앞마당에 잔디를 깔고 그 주변을 꽃들로 촤라락 휘장을 치셨다.

꽃들은 외로움을 달래줄 가장 친근한 벗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물확도, 옛날 절구도, 앙증맞은 도자기 인형도 꽃 주변에 배치되었다.

물확에는 수련이 수련수련 피어나서 어머니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뚝뚝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아기자기한 정원을 가꾸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부지런한 주인을 만난 뜨락의 생물들은 윤기가 넘쳤다.

쑥개떡에 참기름을 자르르 바른 것처럼.

그런 쉼 없는 운동성과 부지런함이 장수비결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가겠다는 연락과 동시에 어머니는 동분서주했다.

봄에는 미나리, 달래, 돌나물, 두릅 등이 보따리에 채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따리는 점점 부풀어져만 갔다.


여름에는 옥수수 가을이면 밤과 은행들로 짐이 대폭 늘어났다.

집 뒤가 바로 선산이고 거기엔 밤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어머니의 마당발이 존재의 이유를 발하는 시간이다.

앞치마면 앞치마 자루면 자루 봉지면 봉지마다 밤들의 대 향연이 펼쳐졌다.

어머니가 챙겨주신 밤은 햇밤이 나올 때까지 요긴한 간식이 되었다.


어디 밤뿐일까.

집 앞엔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나무 역시 너무나 많은 열매를 매달았다.

온통 앞마당에 재래식 화장실 냄새를 풍기며 열매들이 떨어졌고 그 처리는 어머니 몫이었다.

긴 장화를 신고 고무장갑을 낀 채 작업은 시작됐다.

냄새 따윈 어머니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산책길에 몇 개만 떨어져 있어도 코를 찡그리며 피해 가는 이 냄새나는 열매를.

어머니는 오로지 자식들에게 줄 마음 하나로 이것들을 까고 짓뭉개면서

뽀얀 속껍질과 조우하셨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그 수고스러움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죄인이 된다.

해마다 너무 많은 양으로 묵은 것은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웃이나 지인들에게 퍼내어도 은행알은 화수분이었다.


은행이 평소에 그리 쓰임새가 많은 것도 아니고 조금씩 먹는 것으론 도저히 어머니가 주신 그 많은 양을 소화해내지 못했다.

고역스런 노동과 마음의 결정체를 버려야 하는 심정도 작업만큼이나 쓰렸다.

안 가져간다고 하면 어머니가 느낄 공허감을 메꾸는 방식이 고작 그거라니.

이래서 자식은 태산 같은 부모마음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자식이 아니라면 이렇게 고되고 험한 작업을 할 수 없는 일이다.

흔한 거 그냥 내버려 두면 그만이다.

궁핍의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한 어머니에겐 그것도 귀한 식량이었고, 자식들을 살찌울 영양소였다.

이렇게 우리가 가겠다는 연락은 곧 어머니의 조급증으로 연결되었다.


보따리를 아무리 부풀리고 있어도 우리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머니는 십 분이 멀다 하고 전화를 하셨다.


"왜 안 오니?"

뚝.

"어딘데 아직 안 오니?"

뚝.

" 왜 여직 못 오는 거니?"

뚝.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어머니 용건만 말하면 그냥 뚝 끊으신다.

"차 맥히니?"

뚝.

그렇게 여러 차례 성화 속에서 우리가 나타나면 여지없이

"젠장 왜 인제 와."

뜨락으로 퍼져나가는 고성은 누가 들으면 싸움으로 오해할 소지가 크다.

한시라도 자식이 보고 싶었다는 표현이 고성으로 변질된 것이다.


고성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는 내가 가지고 간 된장통, 간장통을 받아 들고

장독대로 향하셨다.

넘치도록 장을 담아 현관 입구에 보초를 세웠다.

행여나 그냥 갈까 봐.


현관에는 된장 간장만 보초를 서는 게 아니었다.

어머니가 받은 크고 작은 선물들이 또 다른 보따리가 되어

실려갈 준비를 끝냈다.

그중에 옷 보따리도 한 몫했다.


옷은 그때 어머니 연세 70대.

그 며느리 40대.

그럼에도 어머니는 내게 입힐 옷을 차곡차곡 부풀리셨다.


딸들이 사다 준 알록달록한 꽃무늬 블라우스.

명절 때마다 친척들이 들고 온 내복.

일하실 때 입는 통 넓은 몸빼.

한복에 어울리는 꽃신.

두툼한 누빔 조끼와 스웨터.


도저히 40대가 입지 못할 온전한 할머니 옷들이다.

복고풍 패셔니스트가 되는 길은 쉬웠다.

그것만 걸치면 간단했으므로.


당신이 아끼고 입지 않은 옷들이 그 품목에 모두 들었다.

내 눈엔 모두 질색팔색 옷들이었지만.

특히 어머니의 발에 맞는 큰 꽃신.

그걸 신고 몸빼를 입고 알록달록한 블라우스를 입으면 약장수 패션으로 딱이었다.

얼굴에 커다란 점하나 그려놓고 막춤을 추면 그것은 곧 서커스가 되고

마당극 주인공이 되는 거였다.


꽃신을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꺼내 신었을 때 막내 동서는 우스개 소리로

"에구 형님만 이쁜 거 줘 어머니는 나도 좀 주지."

하면서 식구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40대라도 한창 이쁠 나이에 70~80대 옷을 주지 못해 안달했던 어머니의 속마음.

그 속마음을 외면하고 어머니 몰래 옷 보따리는 장롱 속에 감추고 떠나왔다.

그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어머니는 전화로 노발대발하셨다.


옷뿐만 아니라 지폐도 내게 전해주셨다.

너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네 몸 하나 잘 간직하라고.

아프면 남편이고 자식이고 다 소용없다고.

아들 편이 아니고 늘 내 편이 되어 주셨다.


아들에겐 절대 안 주시고 꼭 내 손에 쥐어주셨다.

쟤(아들) 한테는 말하지 말라면서.

우리가 조금씩 드린 용돈은 한 푼도 안 쓰시고 간직했다가 다시 복리로 돌아왔다.

다른 식구들이 드린 돈까지 합해서.


매번 어머니는 내가 안 됐던 거였다.

첫째 동서와 막내 동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늘 그녀들이 하고 싶은 걸 다 누리면서 살았다.

우리는 처음 시작한 사업이 쫄딱 망했다.

죽을 쑤고 살아야 되느냐 죽어야 되느냐 그런 시기였다.

쟤는 옷도 못 사 입겠구나! 구원해주고 싶은 대상이었다.

옷보따리는 그런 어머니 마음의 발현이요, 실천적 연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리도 안정되어 갔지만 어머니 마음속엔 항상 우리가 못 사는 자식으로

낙인 되었다.


4년 전.

운동 중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의식이 멀쩡하시더니.

남편과 서둘러 어머니에게 갔지만 이미 어머니는 혼수상태였다.

그저 숨만 겨우 붙어있을 뿐.


한쪽 의자에 앉아있다가 시누이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혼수상태가 되기 하루 전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환자복으로 갈아입히려고 했단다.

그런데 절대 안 된다고 완강하게 거부를 하시더란다.

여긴 집이 아니라 이걸로 갈아입어야 된다고 설득을 해도 막무가내로.


시누이들이 반 강제로 옷을 갈아입히게 되었고,

한쪽 팔에서 뭔가가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손수건에 꽁꽁 싸맨 단단한 물체는 다름 아닌 지폐였다.


이게 뭔 돈이냐고 물었더니 우리 아들 결혼식 축의금으로 마련해 둔 돈이라고 하셨단다.

잊어버릴까 봐.

잃어버릴까 봐.

어머니는 그것을 고쟁이도 아닌 팔뚝에 싸매고 병원행을 하셨다.


그 시기가 아들이 결혼식 날짜를 잡아둔 때였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그것을 전해주려고 일급비밀로 묶어둔 거였다.

끝까지 우리에게 직접 전달하시려던 계획이었다.

이것이 시누이들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실토를 하셨다.


그리고 이튿날 우리가 당도하기도 전에 혼수상태가 되어버렸다.

아들이 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걸 아신 어머니.

생애 마지막으로 손주에게 전해줄 축의금은 그렇게 꼬깃꼬깃 덩어리가 되어 전달되었다.


어머니는 백만 원을 목표로 하셨을 것만 같다.

조금이라도 더 모으자, 모으자.

우리가 그 며칠 전에 갔을 때도 건네주지 않았던 것은 목표액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작 그렇게 될 줄도 모르고.


팔십만 원을 남겨주고 돌아가셨지만 어머니 마음을 나는 안다.

그걸 채우기 위해서 당신 잡숫고 싶은 것도 꾹 참았다는 걸.

마지막 순간까지 뭔가 보탬이 되고자 마음고생 하셨던 어머니는 손자의 결혼식도

못 보시고 떠나가셨다.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어머니와의 따뜻했고, 푸근했고, 우악 짐에 기 눌렸던 순간들이

하나의 영상처럼 지나갔다.

겉은 장작개비처럼 딱딱했지만 속에 자리한 따뜻한 모성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지아비의 병시중과 엿장수의 고된 일상.

그런 환경에서도 늘 씩씩했던 어머니.

고달픈 여자의 일생을 그렇게 마치면서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진정 이 땅의 聖人(성인)이었다.


이승의 소풍은 비록 호사롭지 않았지만 천상에서는 지상에서 누리지 못한 복을

맘껏 누리시길 빈다.

나는 원주 계곡에서 엄마라고 부르던 그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엄마! 그곳 생활은 어떠신지요?





고부 그게 뭔데요?

5화를 끝냈습니다.

5화 까지는 저의 며느리 시절 과거사입니다.


6화부터는 제가 시어머니 자리로 옮겨 앉겠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견주어 보는 일도 유의미하겠다는 생각으로 연재를 계획했습니다.

앞으로 엮어지게 될 글도 관심으로 지켜봐 주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