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에 쌀 씻기
그해 여름에 시집식구가 총동원되어 강원도 원주 계곡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시부모님.
여섯 남매.
며느리, 사위들.
그 곁에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님과 조카들까지 함께 하는 대규모 야유회였다.
내겐 이 집단 야유회가 심리적 부담이었다.
그렇게 많은 식구들과 어디로 놀러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친정은 아버지가 3대 독자였고 외갓집도 단출한 가족이었다.
보따리 보따리 싸들고 우린 피난민처럼 그곳에 도착했다.
싸들고 간 재료들을 풀어 저녁을 짓고 계곡이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지금처럼 사 먹던 시절이 아니고 해 먹던 시절.)
여자들에겐 특히 며느리들에겐 번거롭고 복잡한 일들이다.
나는 쉴 새 없이 먹거리들을 퍼 날랐고 수북이 쌓인 설거지를 해결했다.
설거지나 잡일은 항상 둘째인 내 차지였다.
주방장은 항상 형님이었고 그 뒤를 처리하는 이른바 시다바리(조수) 는 내 역할이었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완벽한 위계질서라고 해야 맞다.
저녁 시간이 지나자 시누이들과 남편은 고스톱을 친다고 모여 앉았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고스톱을 할 줄 모른다.
굳이 배울 필요도 없었고 그런 류의 오락을 즐기는 것에 따뜻한 시선이 얹어지지 않았다.
화투 하면 도박과 연결 짓는 소심파였기 때문이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각자 취향대로 놀기로 했다.
나는 나대로 떨어져서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잠자리는 넓은 독채를 하나 얻어 다 같이 혼숙을 하는 거였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시댁 식구들과 한 공간에서 잠을 잔다고?
마땅히 구석진 자리가 내 명당자리로 정해졌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슬슬 몸이 쳐지기 시작했다.
말이 놀러 간 것이지 거긴 놀러 간 게 아니었다.
매사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고 마음을 널찍한 곳에 내려놓을 수 없는 조바심의 극치가
놀러 간 것으로 포장된 곳이다.
하루종일 마음속엔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집에 가겠다는 희망이 넘실거렸다.
피곤은 눈꺼풀에 무거운 추를 매달고 암막을 치기 시작했다.
내리 닫히면 다시 뜨고 닫히면 다시 뜨다가 결국 자리에 늘어지고 말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잠 속으로 막 진입했을 찰나 누군가가 자꾸 내 발을 걷어차는 거였다.
샛눈을 뜨고 보니 형님이 내 발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건 뭔 시추에이션?
막 잠이 든 사람을 깨워서 내일 아침 쌀을 씻어다 놓으라니.
내일 일은 낼 하면 될 것을 지금 이 시간에 굳이 쌀을 씻어다 놓을 이유가 뭔가?
잠을 깨운 것도 속상한 일인데 당장 쌀을?
나는 그대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곧이어 빨리 일어나라고 발 독촉이 계속되었다.
친정에선 그럴 사람도 없었지만 만약 그랬더라면 "낼 하면 되지 뭐 하러 지금 쌀을 씻으래."
발끈했을 것이다.
만약 이 상황에서 반발한다면 분명 큰 소리가 날 게 뻔했다.
큰소리가 나면 온 가족이 불편할 것이고 집에 가면 두 가정이 2차 대전을 치를 일만 남았다.
`그냥 내가 참자.`
그대로 일어나서 나는 함지박에 쌀을 담아 계곡으로 내려갔다.
저 밑바닥 물이 있는 곳까지 내려가기엔 밤중의 행보는 훈련이 필요한 고난도 험로였다.
나무뿌리들이 엉켜있고 크고 작은 바위들이 웅성거리는 곳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넘어져 계곡으로 다이빙을 할 판이었다.
빈손으로 내려가기도 벅찬 지형이다.
쌀 함지를 옆구리에 끼고 한 손은 돌덩어리들을 더듬으며 하행했다.
밤중에 벌어지는 이 훈련은 유격훈련 아닌 동서 훈련이었다.
마침 칠흑같이 어두운 밤은 아니었다.
보름 전후의 일그러진 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폭도 조심스럽게 물가에 닿았다.
함지박을 내려놓고 나는 흘러가는 시커먼 물을 내려다보았다.
물은 어릴 때부터 굉장히 무서워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입원해 있었던 수원 도립병원 앞에 커다란 분수가 있었고
거기엔 시커먼 물이 출렁거렸다.
연꽃이 피어나고 있었지만 그 꽃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물은 무서웠다.
달밤에 세차게 흘러가는 시커먼 물이 그때의 무서움을 몰고 왔다.
어쨌든 내겐 숙제가 있다.
이 쌀을 안 씻고 다시 올라갈 수는 없다.
중심은 쳐다보지 않기로 하고 가장자리 물에만 눈길을 주면서 쌀을 씻었다.
허연 뜨물이 달빛을 받아 출렁거리며 떠내려갔다.
`당신 거기서 뭐 하는 거요?`
`글쎄요 이 밤중에 쌀 씻기 명령이 떨어졌다오.`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행적을 알리지 않은 채로 희뿌연 달빛 아래서 나는 모노드라마를 엮고 있었다.
달빛 조명아래서 허연 쌀뜨물은 미련 없이 잘도 흘러갔다.
내 마음도 함께 그 뿌연 물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이 밤중에 쌀을 씻어오라는 어처구니없는 동서의 명령은 내 죽어도 잊어버리지 않으리라.
그 후 줄곧 원주 계곡은 평생 내 마음의 한탄강이 되었다.
이런 내 모습은 생각지도 못하고 남편이란 사람은 고스톱에 심취했다.
그깐 몇 푼을 땄느니 잃었느니 마누라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내가 보이지 않자 어머니가 나를 찾아 나섰다.
"에미야, 에미야."
"에미야 어딨니?"
어둠 저쪽에서 들리던 어머니의 나를 찾던 목소리는 간절함으로 울려 퍼졌다.
나는 함지박을 끼고 어머니 목소리를 따라 다리에 힘을 가했다.
내려갈 때보다 함지박의 무게가 배가 되었지만 행군을 멈출 수는 없었다.
드디어 어머니가 서있는 자리 앞에 섰다.
"너 거기서 뭐 했냐. 그 껌껌한 데서."
"쌀 씻어 왔어요."
"쌀은 왜?"
"형님이 낼 아침 쌀을 씻어다 놓으라네요."
허옇게 세수를 마친 함지박을 어머니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곤 동시에 울음보가 터졌다.
참았던 울음보는 곧 폭포수가 되었다.
어머니는 함지박을 받아 내려놓고 큰손으로 내 눈가를 훔치셨다.
왼쪽 눈 한 번 쓰윽.
오른쪽 눈 한 번 쓰윽.
유리창에 맺힌 빗물이 손수건으로 닦여지듯 쓰윽 지나간 손길에도
여전히 눈물은 푸짐하게 흘러내렸다.
"울지 마. 울지 마라."
그 말은 `내가 다 안다.`
`내가 네 맘 안다.`였다.
위안의 메시지를 따라 어머니의 말씀이 이어졌다.
"젠장, 쌀은 아침에 씻으면 되지 뭣하러 지금 씻으래."
" 울지 마. 울긴 왜 울어."
악센트가 세게 버무려진 어머니의 말은 곧 등 두들기는 소리로 변주되었다.
순간 어머니는 나의 친정엄마가 되었다.
다른 동서들은 친정엄마가 계셨지만 나만 친정엄마가 안 계셨다.
그 속상하고 허전하고 아련한 속내를 어머니는 엄마를 대신해서 채워주셨다.
함지박을 들고 어머니의 큰 발을 따라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나는
어머니를 향해 "엄마, 엄마."를 연발했다.
그 이후부터 어머니는 나의 엄마가 되었고 나는 공식적으로도 엄마라고 불렀다.
예전부터 시어머니 시집살이보다 동서 시집살이가 더 어렵다고 했다.
어렵다는 건 더럽다는 것이다.
근거 없이 내가 작아지는 것이다.
그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대중가요 속 노랫말이 아니다.
정말 내가 누추해진다.
남편의 형제들로 인해 맺어진 어쩔 수 없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연령대가 비슷하지만 사람의 성품에 따라서 얼마든지 세도정치가 가능하다.
이 묘한 인간관계의 얽힘은 만날 때마다 괴로움으로 점철되었다.
차라리 안 봐도 그만인 남남이라면 질긴 끈 속에서 괴롭진 않았겠다.
시어머니 명령과 동서의 명령은 결이 다르다.
한마디로 아니꼬웠지만 참아야만 했다.
때론 치미는 울화를 벌컥 터뜨리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입장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형님은 형님으로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그 대신 억울함은 당신이 풀어주겠다는 애매모호한 가족법을 만드셨다.
부당해도 명령을 따르자니 속이 뒤틀렸고 안 따르자니 대법원장(어머니) 에게
배신을 때리는 일이었다.
민법도 아니고 형법도 아닌 허술한 어머니표 가정법 틀에서 나는 갈팡질팡했다.
위계질서를 교란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의 왜곡.
이런 것들이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고 결국 나는 형님의 먹던 찬밥이 되어갔다.
새벽에 누가 출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느긋하게 일어나서 밥을 해도 얼마든지 여유롭다.
미리 씻어다 놓은 쌀이 불어 터질 거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깨우는 것도 손으로 몸을 흔들어 깨운 것도 아니고 발로 툭툭 차는 행동은 그녀의 최대 불만을
표시한 징표다.
더불어 나의 인격을 모독한 행위다.
계곡이 험한 길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그 밤중에 그런 명령을 내린 심중에는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내포되어 있다.
뭐가 되었든 그녀의 불만스러움이 내게로 전이된 거였다.
시어머니에게 따질 순 없고 만만한 동서에게 화풀이를 했던 거였다.
그걸 뻔히 아신 어머니가 나의 부재를 확인하시고 찾아 나선 이 동서스러움과
시집스러움의 풍선효과는 실로 넓고 깊었다.
나는 내 생애 어디서든 내가 겪은 이 사건을 속풀이 하고 싶었다.
어두운 밤 계곡에서 더듬거리며 내려가 쌀을 씻던 그 쓴 기억을
꼭 한 번 끄집어내고 싶었다.
되돌리고 싶지 않지만 되돌리고 싶은 기억을 말이다.
돌의 거친 질감도 땅바닥을 기던 묘기도 그려내고 싶었다.
쌀을 엎지르지 않으려고 애쓰던 손가락 발가락의 안간힘도 대변하고 싶었다.
쌀을 엎지른다면 온 가족이 한 끼를 굶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그곳을 배회하던 시간들을 폭풍처럼 몰고 오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 찢어진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아마도 형님은 그날로 그 일을 잊었겠다.
언제나 가해자는 이미 자기가 한 행위를 잊은 지 오래고 피해자는 그것을 잊지 못한다.
가슴에 꽁꽁 싸매놓고 속울음을 토해낼 뿐이다.
나는 내가 겪은 일은 잊혀지지 않은 한 언제든지 글로 재생할 수 있다.
누구에게든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이유다.
어머니가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갈 만큼
참으로 많이 억울했고, 속상했고, 상처받았다.
내가 참으면서 구성원들의 평화는 지켜졌지만 평화뒤엔 한 사람의 인격이
짓뭉개졌다.
사람에게 인격이란 무엇인가!
사람에게 자존감이란 어떤 것인가!
철학적으로 심도 있게 자문해보고 싶은 명제가 원주 계곡에서 오래전에 벌어졌다.
엄마 아닌 엄마로서 내게 방풍막이 되어 주셨던 어머니.
방풍막이 사라진 시집은 언제나 삭막하다.
북풍한설이 내려도 받아쳐줄 방패가 없다.
나도 이미 시어머니가 된 입장이지만 지금도 시어머니의 부재는 여전히
옆구리에 냉기를 머금는다.
그때 어머니가 부르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