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선의 신박한 쓰임새
요즘 들어 시어머니가 가끔 보고 싶다.
친정엄마는 병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시어머니와 더 긴 시간을 채워왔다.
어머니는 사근사근하고 여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씩씩하고 당당하고 기가 센 여전사다.
어머니는 태생적으로 강한 체력을 타고났으며 어려운 환경과 더불어 마음과 몸이
더 견고해지셨다.
환갑이 지났어도 20kg짜리 쌀 한 포대는 거뜬히 어깨에 짊어지고 이동하셨다.
오히려 젊은 며느리가 작은 보따리 하나에도 쩔쩔매고 있으면 "어휴 그까지 걸 가지고 뭘 쩔쩔 매."
하면서 번쩍 들어다 옮겨놓는 일이 다반사였다.
고무신도 보통 남정네들이 신는 고무신 문수인 10문 7은 어림도 없었다.
마루 밑에 놓인 어머니 고무신을 신어 본 적이 있는데 어른 신발에 아기 발이 들어선 듯
질질 끌렸다.
손과 발의 크기가 곧 체력으로 직결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대개 발이 큰 사람들이 장수하고 기력이 좋은 것으로 보인다.
아버님도 술잔이나 들어가야 뭐라 대꾸를 하셨다.
우선 힘에서 우위에 섰으니 큰 소리 한 번 땅 치면 바로 꼬리를 내릴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앞에 터억 버티고 선 장신의 씨름선수가 입을 꽉 물고 주먹을 쥐고 있다면 얼마나 주눅이 들것인가.
바로 그런 형국이었다.
어머니가 한 번 정한 원칙에는 그 누구도 감히 거역을 할 수 없다.
"그거 해."
"네 어머니."
"저거 해."
"네 어머니."
그런 연유로 나는 어머니에게 웃지 못할 사건 하나를 오래전에 또 하나 만들었다.
첫 딸을 낳고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산후조리를 책임지러 오셨다.
지금처럼 산후조리원이 없던 시절이라 대개 친정엄마들이 산후조리를 도왔다.
나는 엄마가 안 계셔서 시어머니가 나를 돕겠다고 그 좁아터진 집으로 오시게 되었다.
우리의 첫 신혼집은 방하나 부엌하나였다.
신축 건물이었는데 200만 원짜리 전셋집이었다.
넓지도 않은 방에다 장롱, 냉장고, 장식장 등을 놓고 보니 방과 부엌이 혼재한 공간이 되었다.
이 좁은 집에서 당분간 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했다.
아무래도 어렵다.
무엇하나 부탁을 하려 해도 눈치가 보였다.
부엌이래야 돌아서면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좁아터진 골목에서 어머니는 연실 미역국을 끓였다.
부엌은 취사와 세탁과 설거지뿐만 아니라 간단한 목욕까지 겸해야 하는 복합 공간이었다.
어머니가 쉴 새 없이 퍼다 주는 미역국은 질릴 대로 질렸고,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뭘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어려웠다.
이래저래 몸이 너덜 해진 상태라 밥보다 잠이나 실컷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
차츰 먹는 양이 줄어들더니 결국 변비에 걸리고 말았다.
산후에 변비로 고생하는 사례는 흔하다.
배는 아팠지만 돌덩이처럼 굳은 그것은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다.
변의만 있을 뿐.
그런 일이 일주일간 반복되더니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심하게 뒤틀리는 진동을 따라 화장실로 뛰어갔건만 배는 요동만 쳤지 원하는 걸 내놓진 못했다.
죽을 것처럼 진땀이 흘렀다.
옆에 있는 남편의 머리채를 흔들면서 욕까지 하게 된다는 출산의 고통.
그것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이 또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나를 쥐고 흔들었다.
변비를 겪어본 사람들은 알 거다.
그 작업이 얼마나 굴욕적인 작업이고 배를 쥐어짜는데 반해 즉시 해결될 기미가 없는 고통임을.
돌덩어리를 빼내보려는 자와 나오지 않겠다고 버티는 무언가의 혈투.
죽기 살기로 힘을 주면서 또 다른 출산의 고통이 찾아왔다.
피칠갑이 되어 겨우 자갈돌 하나를 빼내고 나오게 되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그때 관장약이 없었던지 그 묘약을 이용했더라면 이런 사태는 미연에 방지하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어머니 말을 빌리자면 나팔똥꼬가 된 것이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옆으로 누워서 울기만 했다.
이런 나를 보신 어머니.
아뭇소리 않고 이불만 뒤집어쓰고 울던 며느리의 이불자락을 확 걷어냈다.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그런 눈치 하나 없을까.
방어할 새도 없이 어머니는 우악진 손으로 나의 처참한 치부를 목도하고 말았다.
"어휴, 이걸 어쩌냐. 이 노릇을 어쩌냐."
.....
"이 나팔똥꼬를 어쩐다냐. 나도 첫애 낳고 나팔똥꼬가 됐단다. 그걸로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을 한 줄 아냐."
나는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나팔똥꼬`라는 용어를 배우게 되었다.
당신도 나처럼 변비로 고생하다가 그때까지 치료도 못하고 치질에 걸리게 되었다고 처음으로 내게
고백하셨다.
당신이 고통을 익히 겪었던 터라 어머니는 어떤 묘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때 어머니의 머릿속에 반짝 전구가 켜졌을 것이다.
어머니의 묘책으로 채택된 기발한 아이디어에 나는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가 삼월이었는데 봄이 오고 있던 시기이긴 하지만 쌀쌀했다.
어머니는 버선을 신고 오셨는데 언제부터 신던 버선이었는지 바닥이 연탄을 밟은 듯
새카맸다.
그 시커먼 버선에 장갑처럼 손을 넣으시더니 이걸로 밀어보자 하시는 거였다.
"옛날엔 치질이 생기면 버선으로 밀어 넣었거든."
"엥? 그걸로요?"
"가만있어봐. 이게 직방이여."
의사나 약사도 아니고 간호사도 아니고 한의사도 아니고 수의사도 아닌,
의료계 종사자커녕 그 근처도 안 가본 구식 어머니의 처방전은 실로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소독한 거즈를 취급해도 될까 말까 한 판국에 시커먼 세균 투성이 연탄 버선으로
뭘 하시겠다고?
나는 질색을 하면서 어머니를 밀어냈다.
그러나 우악지기 한량없는 어머니는 "가만있어 봐." 냅다 소리를 지르더니
기어코 그곳에 시커먼 버선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그냥 누워있기만 해도 아픈 상처에 주어지던 어머니의 악력은 가히 신의 한 수였다.
또다시 산고의 고통이 좁은 방을 넘어 이웃집 울타리까지 퍼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고성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박자 삼아 어머니는 어설픈 의사 역할을 당당하게 집행하셨다.
나팔똥꼬가 아니라 트럼펫 똥꼬를 만들어 놓고 어머니는 왜 안 되는 거냐고 씩씩대셨다.
세상에서 시커먼 버선으로 똥꼬처방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내가 유일하지 않을까?
eat dog(굴욕을 참다)처럼 어설픈 선무당의 선례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설사 예전에 행했던 미신일지라도 그건 누구에게 행해졌는지 모르므로.
훗날 어머니와 이 얘기를 하면서 원망반 웃음반으로 박장대소를 한 적이 있다.
시커먼 버선은 치료를 목적으로 한 행위였다기 보다 주술 같은 역할을 했다고 봐야 맞다.
신들린 무당이 환자를 앞에 두고 행해졌던 주술행위 그것이었다.
급하긴 하고 어디서 들은 얘기는 있고 이 참에 이 처방을 써보자.
잊어버리기 전에 즉각 실시!
거부반응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강행했던 어머니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어설픈 샤머니즘이 싫었고 반 강제로 윽박지르던 그 목소리가
두려웠다.
무슨 여자가 저렇게도 기가 세단 말인가.
무슨 여인네가 그토록 과감하단 말인가.
근거도 없는 민간요법이 과학과 의술을 앞질렀던 무모한 시술 아닌 시술은
내 눈에서 홍수가 터지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보름동안 산후조리를 해주시고 어머니는 산너머 용인 집으로 나비처럼 넘어가셨다.
나팔똥꼬를 책임지지도 않고 나 몰라라 떠나가셨다.
그 후 신생아를 데리고 좁아터진 방구석에서 세상의 고통을 다 움켜쥔 채 그 후유증을 견뎌야 했던 지난날.
오래 전의 그 일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니 지워지기는 커녕 점점 더 새록새록 나를 그 시간대로 끌어들인다.
세상에 그토록 아픈 고통은 처음이자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다.
신체 어느 부위이든 다치거나 상처가 나면 아픈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학문 아닌 항문이 탈항 되거나 상처가 생기면 앉지도 걷지도 울고 웃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는 고약한 부위가 항문이다.
배설의 속 시원함을 맛보게 해주는 그곳이 탈이 나면 먹는다는 행위도 즉각 거부반응으로 작용한다.
누구에게 쉽게 내보일 수도 없는 곳이기에 정말, 정말로 잘 지켜내야 한다.
제발 제발 다른 곳은 아파도 이곳만은 최후까지 살아남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그때 절박하게 각인되었다.
왜 좋은 일은 금세 잊혀지고 나쁜 일들은 자꾸만 오래도록 길게 꼬리를 물고
쫓아오는 걸까.
나 보다 한 세대 먼저 태어난 어머니가 더 어려운 시대를 겪었지만, 그다음 세대로 태어난
나 역시 좋은 시절은 아니었다.
허옇게 번진 기계충과 이가 득실거리던 머리를 방치한 채 살아내야 했으며,
공부라는 인간 되기의 수순보다 입으로 들어오는 식량이 더 절박했던 시기를 견디고
두 여자는 姑婦(고부)라는 관계로 맺어졌다.
어머니의 억센 기질은 살아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들 마다 그녀를 더더욱 조여왔을 것이다.
그것은 지아비를 섬겨야 하는 충절로, 아이들을 먹여야 하는 모성으로 거듭 독기를 품으며
질겨져 갔을 테다.
병원과 약이 흔하지 않던 시절의 어려움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처방하고 대처하면서, 때론 샤머니즘을 탁월한 효능감으로 차용했던 어머니.
시커먼 버선으로 상처를 들이밀던 어머니의 근거 없던 힘은
오늘도 내 마음속에 착 엎드려 있다.
우리들의 찌그러진 초상.
80년대 그 언저리는 지금도 내 곁을 맴맴 맴돌고 있다.
한 분은 하늘에서.
한 사람은 현존하는 인물로.
원래는 8월 9일 날 글을 올려야 맞는데 본의 아니게 날짜를 변경하게 되었어요.
왜냐?
6일 날 베트남으로 떠나서 10일 날 귀국하게 되었지 뭐예요.
따라서 4화는 16일 날에나 올려야 하겠지요.
한 번 날짜가 뒤틀리면 계속 어긋날 거 같아 그렇게 정했어요.
한여름에 감기가 들어 좀 고생하긴 했는데 이젠 낫어요.
여행 못 갈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예요.
제가 없어도 이 집 좀 꼭 지켜주시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보살펴주세요.
다녀와서 다시 재밌고 고소한 글로 여러분들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