姑婦(고부) 그게 뭔데요? (1화)

김장의 쓰린 추억

by 김 미 선

, 시, 시 자로 시작된 말.

시금치, 시소, 시계, 시험, 시장.

이 시자로 시작된 말 중에 유난히 꺼려지는 단어가 있다.

시집, 시어머니, 시누이, 시동생.

호칭 앞에 媤(시)라는 접두사가 붙으면서 이 단어들은 왠지

여자들의 촉수를 자극한다.

친정에 속한 가족들이라면 이렇게 신경줄을 찰랑찰랑 흔들 필요가 없겠다.


시아버지, 시동생 보다 우선순위로 혈압을 상승시키는 단어.

그건 시어머니일 것이다.

도대체 이 땅의 시어머니들은 무엇 때문에 새 식구들에게 성치도 않은 이빨을 부득부득 갈아대며 살아왔던가!


아들을 결혼시키게 되면 누구나 시어머니라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것이 무슨 국가공인 자격증도 아니요, 피 터지게 공부해서 얻어낸 학벌 또한 아니다.

일단 시어머니 자격증을 부여받은 엄마들은 왜 媤자 냄새를 풍기기 위해서 안달을 하는 것일까.

(요즘은 안 그런 엄마들이 더 많다)


예외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30대 초 중반 사이에 결혼을 한다.

30년간 애면글면 키워놓은 아들이 어느 날 결혼을 한다고 낯선 여자를 데려오게 된다.

시어머니 자격증을 부여받은 엄마는 괜스레 심기가 들쑥날쑥 해진다.

내 아들의 관심과 애정이 다른 곳으로 옮겨갈 건 자명하다.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던 사람이 내 가족의 일원이 된다고?

이원도 아니고 일원이!


데려온 여자가 이쁘기까지 하다면 `난 젊을 때 쟤보다 더 이뻤어` 삐죽 나온 입술로 괜한

심술보가 터질 수도 있다.

이쁘지 않아도 젊다는 자체로 뒤로 밀려나는 처지가 처량한 거다.

그 여자가 내 곁에 들어와서 내 살림도 훑어보고 지금껏 고요하던 내 우물을 휘젓는다고?

낯선 이의 출현이 어쩐지 심난하다.


다양한 삶을 살아오지 않은 구식 엄마의 머릿속이 복닥복닥 해온다.

이래서 고질적인 시어머니 초발심이 작동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머니의 맘속이 복잡해지는 건 사실일 게다.

왜 시어머니 맘속만 복잡할까.

며느리의 맘속은 더 복잡할 수도 있다.

새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기존의 틀속에 꼽사리 끼는 것도 고단하긴 마찬가지니까.


2019년 5월에 시어머니가 96세로 천수를 누리시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나도 며느리였다.

41년 전에 시어머니의 둘째 며느리가 되었으니 며느리로서의 직책을 오래 유지했다.


그 오래전에 나도 시어머니께 며느리 자격증을 따내려고 어머니를 처음 만났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감을 보는 이상형은 어두운 밤, 밤하늘에 훤히 떠있는 보름달 얼굴을 가진 아가씨였다.

아, 그런데 보름달은커녕 새벽에 겨우 떠 있는 초승달 여자를 데리고 온 거다.

`여덟 달 반 토막 짜리 같은눔!`


`어디서 저렇게 얼굴이 반쪽인 여자를 좋다고 데리고 왔냐! 당장 돌려보내라.`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셨겠다.

표정이 익모초 마시듯 우그러지는 걸로 봐서.

`표정 관리 좀 하세요. 어머니.`

나도 반격하고 싶었지만 반쪽 초승달은 암말 못하고 이 자릴 얼른 벗어나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초승달 같은 여자를 데리고 와서 이 여자와 평생 살 거라고 주책을 떠는 아들이 못 미덥긴

하셨겠지만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선택에 도장을 쾅 찍어주셨다.

옛다, 며느리 면허증.


자격미달의 며느리감은 이렇게 난감 모드로 선택되어 결혼은 고속도로를 타게 되었다.

수원 교차로 다방에서 선을 본 지 두 달 만에 우리는 부부라는 공동 뗏목을 타고

새로운 인생행로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던 것이었다.


결혼식 전에 시어머님과 초고속으로 패물을 맞추러 금은방으로 직행했다.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반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백금반지였다.

시댁도 넉넉한 환경이 아님을 감안해서 금반지도 아닌 백금반지를 선택했다.

나는 어머니께 그게 맘에 든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뜸 "네 맘에 들면 뭐 하냐, 내 맘에 들어야지."

아웅! 강 펀치다.


반지는 분명 내가 낄 것이고 내 것이 되는 것이었다.

비록 어머니의 지갑이 열리는 것이긴 하지만.

이렇듯 괜한 심술보를 터뜨려야만 아들을 놓치는 허전함이 보상되는 것인지 시어머님 다운 매몰참에

어리바리한 새댁 후보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시댁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아침상을 차리기 위해 어머니를 거들게 되었는데, 내가 맡은 임무는 무 썰기였다.

내 팔뚝보다 두 배나 굵은 무를 이리저리 뒹굴리다가 겨우 세모, 네모, 마름모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심사위원이신 시어머님

"야 너는 무도 못 써냐."


워낙 츤데레 타입이신 데다 직설적으로 퍼붓고 뒤끝은 맑음이다.

그렇지만 움추러드는 새가슴을 더더욱 조여들게 만드셨다.

부르지도 않았건만 "네" 하고 마당으로 뛰어나가는가 하면 어머니의 기침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서 밖의 동태를 살피곤 했다.


그날 진짜 힘든 일은 점심에 벌어졌다.

내게 점심 준비를 맡기고 어머니는 아들인 남편을 데리고 논으로 나가버리셨다.

가위눌리는 숙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부엌 옆에 붙은 광에는 온통 가시투성이 나뭇가지들 뿐이다.

그것을 잘라서 가마솥에 불을 지펴야 밥을 할 수 있다.


나무들은 서로 엉켜서 끄집어내는 것조차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무를 자를만한 도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음과 몸이 뱅뱅 돌기만 하고 시간은 여지없이 도망쳐갔다.

콩쥐의 심정이 이랬겠다.


나는 맨손으로 나뭇가지들을 분지르기도 하고 부엌 칼로도 잘랐는데 억세기가 고래 심줄이다.

손바닥에 가시가 박히고 피가 배어 나왔다.

어떻게든 임무 수행을 하기 위해 피가 나든 쥐가 나든 불을 지펴야 했다.

아궁이 깊숙이 빨아들여야 할 불길이 꼬약꼬약 매캐한 연기만 낼뿐,

새댁의 심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연기에 그을리고 가시에 찔리고 눈물, 콧물로 간신히 지어낸 점심밥.

그때 대문 저쪽에서 들리던 시어머니의 발자국 소리는 온몸의 세포들을 곤두서게 했다.

고난의 행진으로 짓게 된 점심밥은 어머니로선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비주얼을 갖추었다.


무쇠솥의 얼룩무늬 밥은 찰기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사막의 모래만 퍼다 놓았다.

제대로 밥을 지었는가 보시기 위해 무쇠솥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어머니의 큼지막한 발이

왜 그렇게 무섭던지.(어머니 발이 정말 크다.)

무쇠솥뚜껑이 열리자 어머니의 탄식처럼 뱉던 한숨.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의 그 한숨 소리는 내 귓전에서 유효하다.


벼락 치고 천둥 칠 줄 알았더니 그냥 한숨으로 마무리해 주신 어머니가 지금도 무한 감사하다.

가시투성이 나무를 자르고 욱여넣어 밥을 짓느라 애썼을 새 며느리에게 그만하면 수고했다는

어머니 나름의 관용이리라.


그 당시 시골에서는 가마솥에 나무를 때서 밥을 했지만 도심에서는 `곤로`라는 신형

조리도구로 밥을 했다.

그것이 연탄으로 바뀌었고 연탄은 곧 가스레인지로 발전하여 지금의 전기 레인지로 안착했다.


그러니 그 낯설고 험한 작업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집은 당장 허문다고 해도 아까울게 한 점도 없는 누옥이었다.

수수깡을 섞어 만든 황토벽에서 우수수 흙이 떨어져 내렸고,

쥐새끼들이 부엌으로 마루판으로 `나 잡아봐라, 용용 죽겠지.` 겁 많은 새댁을 조롱해 댔다.


지금은 경기도 용인이 도심의 위상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만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엄청난 오지였다.

버스 한 대가 오려면 두 시간은 보통이었다.

차 시간을 맞추지 않고 한 대를 놓치면 그런 낭패가 없었다.

길은 온통 자갈투성이 비포장 도로였다.

시댁으로 들어가는 버스 뒷좌석에서 내 머리는 줄곧 버스 천장을 향해 덩크슛을 날리는

기 현상이 벌어지곤 했다.

버스 뒤꽁무니를 따라 뿌연 흙먼지가 길게 꼬리를 무는 그야말로 찐 시골이었다.


새댁은 진땀을 흘리면서 수원에서 용인으로 아버님, 어머님을 뵈러 연실 들락거렸다.

많진 않았지만 논농사, 밭농사를 짓는 촌노의 일상에 둘째 며느리는 이렇게 조력자의 한 사람으로

스며들었다.


시골엘 한 번 다녀온 날에는 녹초가 되어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일도 일이지만 시댁이라는 심리적 부담감이 이토록 어렵고 힘든 것일 줄이야.

그저 부지런히 집안 치우고 명령어에 따라 빠르게 움직일 뿐이었지만,

그 속에 잠재된 시댁 포비아는 한동안 나의 잠자리에 악몽을 데려다주었다.


보름달처럼 훤하고 풍만한 몸매를 가진 여자가 며느리 감으론 역시 최고다.

이리 비틀어진 여잔 적합하지 않다는 걸 어머님은 천리안으로 내다보셨다.

툭하면 아프고, 여차하면 결석이 잦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겨울에 행해진 김장은 내게 있어 평생 잊지 못한 고통과

굴욕감을 퍼다 주었다.


어째서 여섯 남매의 김장을 한 집에서 행해져야 했는가 말이다.

어머니 당사자 몫까지 일곱 가구의 겨울 양식을 마련하는 일은 정말로 대단한 연례행사였다.

김장이 반 양식이니 뭐니 하면서 김장으로 긴 겨울을 버텨내야 했던 시절이다.

김장하기 하루 전날 들어갔던 나는 이튿날 새벽부터 우물가에 배정받았다.

어마어마한 양의 배추는 200 포기가 넘으면 넘었지 결코 그보다 적은 양이 아니었다.

밭에 있던 배추를 모조리 뽑아다 절였으므로.


절임배추를 시베리아 동토였던 마당 우물가(펌프)에서 혼자 다 씻으면서 나는 눈물 콧물로

자책했다.

`바보야, 못한다고 하지. 이따 식구들 오거든 같이 한다고 하지 하란다고 하냐.`

시누이, 동서들이 오기 전에 얼른 씻어놓아야만 한다고 어머니는 나를 불같이 채근하셨다.

어머니의 쇠심줄 같은 고집과 기세를 꺾을 집안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어머니는 새댁인 내가 감히 맞설 수 없는 언터처블이었다.

시어머니의 서릿발 효력은 이미 금은방에서부터 발현되고 있었으므로.


생애 그토록 발바닥에 감각이 없고 콧물을 많이 흘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발바닥은 이미 아무 감각도 없고 장작개비 같았다.


배추를 다 씻고 나서 감각 없는 발을 주무르고 있는데 동서, 시누이들이 김치통을 들고

떠들썩 집안으로 들어섰다.

씻어놓은 배추를 보더니 "벌써 다 씻어놨네."

아무것도 아니란 듯 한 마디 툭 던지던 형님의 그 말이 왜 그렇게 서럽던지.

아마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엄마에게 뛰어가서 온 세상 서러움을 다 털어내면서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내 발은 곧바로 동상에 걸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몇 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중환자가 되었음도 당연하다.

그 굴욕감이 화인처럼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쩌자고 울타리도 없는 찬바람 쌩쌩 불어대는 마당에서 얼음물로

그토록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나는 참 바보 같았다.

그 후로는 절대 시집 마당에서 김치를 담그지 않았다.

아무도 나의 동상 걸린 발을 알아주지 않은 채 서러움은 나 혼자만

김치를 담그는 걸로 대체되었다.


이처럼 열쭝이 새댁은 차츰 헌 댁으로 자릴 잡아가면서 시집이라는 틀 안에서

나름의 법칙을 배워나갔다.

어머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렇게 억울함을 안겨 주셨지만,

그것은 나를 떠보려는 심산인 듯했다.


언제나 묵묵하게 할 일을 하는 둘째 며느리를 떠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 후 어떤 것이든 아낌없이 지원 사격을 해주셨고,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셨다.

좋은 것은 모두 내 몫으로 남겨두셨고, 동서들이 시기를 할 정도로 나를 아끼셨다.

그것만큼은 시누이들까지 인정한다.

아버님도 다른 동서들이 들어서면 아뭇소리 안 하셨지만 내가 눈앞에 나타나면

항상 손을 잡고 따뜻한 아랫목으로 나를 이끌곤 하셨다.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고단함을 견딘 시집살이 울타리가 벌써 40년을 넘었다.

어머니는 지금도 하늘에서 날 내려다보고 계실까?

"어머니, 아무리 그랬어도 배추 200 포기는 너무 했어요."

....

"보름달이 아니었다고 초승달을 보름달로 만들려는 시도는 아니었든 거죠?.

그 덕에 아무 죄 없는 두 발이 보름달이 되는 수모를 겪었지만요."


"어머니!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여전히 내 편이신가요?"

그땐 어머니가 미웠지만 지금은 "보고 싶어요."



유재석 캐리커처. 필자가 그린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