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셨다.
살아계셨다면 딱 100세가 되신다.
시대적 배경도 그렇거니와 개인적으로도 형편이 어려워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 당시에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어머니의 고생도 장편 소설 다섯 권은
내리찍을 만큼 사연 많은 인생이었다.
지금의 경기대학교 근처에 `산의실` 이라는 마을에서 칠 남매의 첫째로 태어나셨다.
내리 동생이 여섯 명.
주렁주렁 매달린 동생들을 돌보면서 눈만 뜨면 땅바닥에 엎드려 농사를 지어야 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핑계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천덕꾸러기 첫째 딸.
그녀는 오로지 살림 밑천으로서의 역할로 만족했다.
입 하나 더는 격으로 스물두 살에 결혼을 했고 슬하에 여섯 남매를 두셨다.
농경시대답게 농사를 짓고 소를 한 마리 키우면서 얼그럭 덜그럭 사셨다.
소는 농사짓는데 꼭 필요한 머슴이었으며 재산을 늘리는 수단이기도 했다.
소를 판 목돈의 용처는 주로 자식들 교육시키는데 쓰였다.
그랬던 소가 오히려 집안을 흔들리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버님이 소 한 마리를 수원 연무동 우시장으로 팔러 가시다가 황소 뒷다리에 걷여 차여 그날로 자리보전을 하게 되었단다.
가장이 병석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그 집안 형편이 어떻게 되었을까.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아마조네스로 무장해야 했다.
누구나 환경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어머니 혼자 논농사 밭농사를 지으면서 쨤쨤이 엿장수로 변신을 하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쌀로 엿을 고았다.
그것을 함지박 가득 머리에 이고 성남 모란시장으로 팔러 가셨단다.
옆 동네도 아니고 모란시장으로.
엿이 다 팔린 날은 그나마 가볍게 귀가를 서둘렀겠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팔다 팔다 그대로 다시 이고 지고 둔탁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하루는 미처 팔지 못한 엿을 이고 오다가 발을 헛디뎌서 엿이 길바닥으로 나뒹구었단다.
엿은 흙 투성이가 되었고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우셨다고 한다.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는 임질은(머리에 이는 것)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겨울에는 특히 미끄러운 눈길로 더욱더.
또 어떤 날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지 못하고 물엿을 만들어 이고 오셨다고 한다.
아이들은 멋도 모르고 엄마의 남은 물엿을 탐하며 덤벼들었을 것이 뻔하다.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아득한 옛날얘기처럼 어머니가 들려주셨다.
집에 딸린 자식은 여섯이요, 지아비는 골골대고 누웠으니 엿장수 아니라 그 보다 더한
일도 해봐야 할 처지였던 어머니.
생활전선으로 나서야 했던 어머니의 고달픈 삶의 여정이 얼마나 자갈밭이었는지
짚어주지 않아도 훤히 보인다.
겨우 일어나 화장실 출입만 가능했던 아버님의 체력으로는 이토록 힘든 아내의 고생길을
메워줄 방도가 없었다.
자연히 어머니의 심기가 뾰족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내가 새댁 시절에 두 분과 밥을 먹다가 크게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시골에선 있을 법한 둥그런 알루미늄 밥상에 셋이 둘러앉게 되었다.
아버님은 워낙 체구도 작은 데다 사고 이후 몸이 더 왜소해지셨단다.
입맛을 잃고 식사를 제대로 못하셨기 때문이다.
그날도 작은 밥공기에 펐던 밥이 밑바닥을 드러내지 못한 채 아버님은 수저를 놓으셨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
"넨장 밥맛 없어도 먹어야지 그럼 어쩌라고."
.....
"젠장 애기도 아니고 그렇게 깨작거려서야 언제 힘이 생겨."
.....
" 옌장 고까짓것도 못 먹고 숟갈을 내려놔?"
....
"으이구우."
넨장, 젠장, 옌장까지 읊으신 어머니 말에 나는 웃음이 폭발할 것 같았지만
감히 웃을 수는 없고 애꿎은 밥만 연실 퍼댔다.
조금 더 있으면 춘장, 된장, 고추장, 화초장까지 퍼낼 판국이었다.
밥을 퍼넣다가 결국 어머니의 허옇게 흘긴 눈과 마주쳤다.
쿡, 쿡, 쿡, 쿡.
순식간에 어쩔 새도 없이 웃음 둑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을 가리고 꼭 토악질하러 뛰는 사람처럼 부엌문을 통과했다.
그 길로 부엌 뒤에 붙은 장독대 뒤로 숨어들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쿡
웃어대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진 웃음은 주책맞게도 쉽게 그치질 않고 계속되었다.
밥을 먹다가 웃음을 못 참고 사라진 며느리를 쫓아오신 어머니.
그 큰손으로 내 등을 철퍼덕 때리면서 "야! 뭐가 웃겨 빨리 가서 밥이나 먹어. 넨장."
겨우 수습되려던 웃음이 또다시 `넨장` 이라는 말과 함께 폭소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아버님도 옆에 없으니 참았던 웃음을 그냥 다 퍼내버렸다.
숨을 데라곤 장독대뿐.
금세 들키고 등을 한대 쳐 맞으며 어머니 특유의 `넨장`이라는 한탄조 가락에 나는 폭삭 무너졌다.
그 뒤로도 수시로 밥 먹을 때마다 퍼붓던 어머니의 스트레스 펀치는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지만 차츰 웃음둑을 관리해 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매번 아버님과 마주 앉는 식사 때가 어머니로서는 속상한 것 다 퍼내버리는
카타르시스 창구였다.
어디다 대고 하소연은 못하겠고, 얼른 잘 먹고 일어나 일이라도 좀 해야
내가 이 고생을 면하겠다는 질퍽한 채찍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얼굴 표정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밥 먹는 때뿐이었으니 그때 꼭 어머니는
타박을 푸짐하게 늘어놓으셨다.
이런 장면이 생소했던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것이 시집이라는 함정이다.
그냥 웃음보가 터지면 웃으면 되는 것을.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는데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어느 眼前(안전)이라고 웃음보를 함부로 터뜨릴 수 있을까.
더구나 어머니에겐 한탄과 넋두리가 섞인 심각한 순간인데 그때 웃는다는 건
失笑(실소)가 되는 것이다.
눈치 없는 바보나 하는 행동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말하는 사람의 제스처라든지 표정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그치, 그치.
친정 같으면 그냥 웃다가 밥풀이 튀어나왔어도 폭소를 마구 쏟아냈을 것이다.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 이라더니 웃음도 삼 년은 참아야 했을까?
고달픈 생을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하신 어머니.
울고 싶어도 울 새가 없고 웃을 여유조차 없었던 어머니.
가장이라는 직책은 이렇게 며느리에게 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만약에 아버님이 건강하셔서 가장으로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셨다면,
어머니가 밥상머리에서 눈을 허옇게 흘기시며 타박을 하진 않았겠다.
그렇게 되면 나도 참을 수 없는 웃음으로 고역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겠다.
시집살이는 웃고 싶을 때 맘대로 웃어도 되는 곳이 아니란 걸
아버님이 가르쳐주신 셈이다.
겉으론 퉥퉥 거리셨지만 어머니는 아버님을 정성으로 수발하셨다.
겉바 속촉의 어머니 심성이 어디로 내빼진 않았겠다.
소릴 지르면서도 한편으론 지아비를 측은하게 생각했고 끼니때마다 정성을 다 하셨다.
아버님은 점차 병세는 호전되었지만 90도로 구부러진 허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둘째 며느리인 나를 보러 나오셨을 때도 구부러진 허리로 지팡이에 의지해서 겨우 걸어오셨다.
저 연세에 벌써 왜 저러실까 의구심이 들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던 거였다.
어머니가 된장, 고추장 아닌 넨장을 늘어놓으면서 밥상머리에서 호통 아닌 호통을 치실 때마다,
잠자코 계시던 아버님도 때론 반격을 가할 때가 있었다.
어머니가 구시렁거릴라 치면 "막걸리나 한잔 퍼와." 하면서 명령을 내리셨다.
어머니는 그 바쁜 와중에도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막걸리는 떨어질 새 없이 담그셨다.
막걸리가 아버님의 유일한 낙이었으니까.
어머니 대신 내가 뽀얀 막걸리를 노란 양재기에 찰랑대고 퍼다 드리면 순식간에 다 드시고,
매번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여자는 자고로 순종해야 되는 법이여. 여필종부여. 엇다대고 여자가 큰소리여."
거기다 어머니의 대꾸가 있으면 "에기랄."
두 번째 대꾸에는 "제기랄." 이 이어졌다.
아버님은 그나마 각종 장류가 나열되진 않았고 그 대신 "에기랄. 제기랄."로 반박하셨다.
격하게 싸움은 하지 않았지만 이러다 전쟁 나는 거 아닌가 며느리인 나는 불안 불안했다.
자꾸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정말로 좁은 소반에서 셋이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는
시간이 제일 고역이었다.
친정 부모님 같으면 "왜들 그러신대. 그만들 하세요."
톡톡 쏘기나 했을 텐데 이건 무슨 희극이요, 비극인지.
감히 노란 병아리 입장에서 나는 그저 두 분이 엮는 단막극을 가만히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웃음보를 조절하면서.
수위를 잘못 조절했다간 또 장독대로 뛸 판이었으므로.
웃음도 맘대로 못 웃어. 된장.
필자 그림. 김준현 캐리커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