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
굳이 샤머니즘을 들추지 않더라도 인생에는 그 사람만의 로드 맵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그 사람이 갈 길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언제 고난을 만날지 운이 트일지 말이다.
하려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도 그 길은 그 사람만의 로드 맵에서 벗어났기 때문일 거다.
결혼도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연분이 이어져야 한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몰라서 더듬거릴 뿐이다.
죽음까지도 당신은 언제 어떻게 몇 시에 운명할 거라는 예정이 되어 있을 거라 본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를 모르고 무심하게 살아간다.
결혼에 관심도 뜻도 없던 여자가 선을 본 지 겨우 2달,
짧은 기간 안에 결혼하게 된 것도 나의 운명이라고 믿는다.
내 눈에 보이지 않던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난 현상이 결혼일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텀벙 결혼이라는 또 다른 우물로 뛰어들었지만 거긴 우물이 아니었다.
넓고 깊었으며 집채 만한 파도가 수도 없이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고생을 바가지가 아니라 드럼통으로 할 거라는 예정된 지도를 읽어내지 못했다.
결혼식 웨딩마치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닌 고생길로 들어선 길이었다.
그걸 알아챌 수 없었기에 웨딩마치는 행복마치가 될 수 있었다.
`고난`이라고 쓴 팻말이 나를 뒤따라오고 있었음에도.
우린 급하게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신혼집은 방 한 칸에 부엌 하나가 딸린 신축 건물이었다.
전세로 200 만원이었다. (80년대 초)
방도 크지도 않았지만 부엌은 정말 돌아서면 팔이나 머리가
부딪히기 일쑤인 칼 부엌이었다. (고부 그게 뭔데요? 3화에서 언급)
손수건 만한 부뚜막에 곤로를 갖다 놓고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밥을 했건만 그것은 밥인지 과자인지 바삭하고 푸석했다.
그나마 중간은 먹을만했다.
식사 후에는 항상 시커멓게 그을린 냄비를 이를 악물고 닦아야만 했다.
음식을 할 줄 몰라서 그깐 밥 한 끼를 준비하면서도 긴 시간 허둥대기 일쑤였다.
다행히 신랑은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 서툴고 어색한 신부의 살림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그 좁은 집에서 딸이 태어나고 불편하나마 평화를 유지하며 살았다.
3년을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은 내게 선전포고를 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겠다는 거였다.
아들 한 명이 추가되면서 식구는 네 명으로 불어난 상황에 사업이라니.
경험도, 인맥도, 돈도 없는 형편에 뭔 사업이냐고 반대표를 던졌다.
마누라 말은 그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는 저벅저벅 앞장섰다.
그것은 우리의 앞날에 먹구름을 몰고 올 전조였다.
고철사업을 한다고 뛰어든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연한 수순이다.
그에겐 사업을 잘 일으킬 만한 토양이 준비되지 않았다.
전세금도 날아가고, 퇴직금도 사라지고, 조금 모았던 돈까지 다 휩쓸려 날아갔다.
돈을 모으는 건 어렵지만 날아가는 것은 순식간이다.
코딱지 만한 방이나마 평화를 유지했던 집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공터에 뚝딱뚝딱 하루 만에 판잣집을 세우고 그곳이 생활터전이 되었다.
그래도 산 입에 거미줄은 칠 수 없었다.
부엌에서 밥을 차리고 있으면 어디선가 쥐 두 마리가 꼭 때맞춰 나타났다.
두 마리 쥐는 내 발등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긴 꼬리를 흔들면서 둘이서 다정하게 나를 희롱했다.
부부인지 부모 자식 간인지 알 순 없었지만 대낮엔 쥐가 잘 나타나지
않는데도 얘네들은 간도 컸다.
쥐들조차 우리를 업신여기는 거였다.
부엌이랄 것도 없는 판자데기 몇 개, 그 공간이 쥐 소굴이 되어버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튀어나갔다.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쥐들은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네 공간을 점유하며 세력을 넓혀나갔다.
쥐와의 동거는 2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렇게 무섭고, 더럽고, 불안한 판잣집 생활을 뒤로
우리는 올망졸망 보따리를 싸들고 대전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돈을 모아서도 아니요, 더 좋은 환경이나 직장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조건 내려왔다.
남편은 용인 토박이요, 나는 수원 토박이로 대전은 단 한 명의 연고도 없었다.
말만 통할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대전이란 낯선 곳에서 다시 우리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월세로 얻은 집은 2층이었는데 1층이 방앗간이다.
찬 밥 더운밥 가릴 새 없이 그곳을 선택했다.
낮이고 새벽이고 방앗간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탈탈탈, 덜덜덜 고장 난 배처럼 둥둥거렸다.
방앗간 특성상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진저리를 치면서 신경쇠약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남편이 객지에서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자 그 화살을 내게 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아무 말 않고 시베리아 벌판을 건너고 있는 내게
동반자로서 하면 안 되는 언행을 저질렀다.
툭하면 만취해 들어와 폭언을 하고 밥상을 엎었다.
묵묵히 밥을 먹다가도 치미는 울화통을 못 참고 밥상을 냅다 벽에 던졌다.
벽에 부딪힌 그릇들이 깨진 채 나 뒹굴었고,
온 벽이 김칫 국물, 국 국물로 추상화를 그려댔다.
이내 나는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내 막다른 신세를 한탄하며 울었다.
옆에서 여섯 살짜리 딸은 간장 종지만 한 손으로
깨진 밥그릇, 국그릇을 주어 담으며
"엄마 울지 마, 엄마 울지 마." 애원했다.
방앗간 둥둥거림이나 폭언도 힘들었지만 또 하나 나를 괴롭히는 요소는 바퀴벌레였다.
1층이 바로 방앗간이란 환경도 있었겠지만 부엌이 어둡고 습했다.
화장실이 근접해 있어서 바퀴벌레의 온상으로 최적지였다.
불빛만 사라지면 온 동네 바퀴벌레들이 이 집에서 집회를 하려고 몰려들었다.
도무지 세려야 셀 수도 없이 새카맣게 떼를 지어 득실거렸다.
쓰레받기로 푹푹 퍼담을 지경이었다.
수없이 뿌려대는 살충제에도 개체수는 줄어들기보다 점점 더 늘어만 갔다.
`아무리 약을 쳐봐라 우리들이 물러나나.` 오랜 시간 버텨온 생물 종답게 대단한 기세였다.
유럽에선 길거리에 널브러진 인분 때문에 하이힐을 신었다고 했지만,
나는 하이힐이 아니라 장화를 신고 싶었다.
생애 처음으로 가난에 비례해 바퀴벌레 수는 증가한다는 논문을 쓰고 싶었다.
그 정도로 그것들은 지긋지긋하고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거기서 7년을 살고 이사를 하는 날,
우리는 방앗간 소음과 바퀴벌레의 물결에서 해방되었다.
해방은 되었지만 생활은 여전히 남루했다.
남편은 생전 해보지 않던 화물차 기사가 되어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다.
월급쟁이 화물차 기사였다.
그러다가 허름한 중고차를 한대 사서 내 차로 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