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뿐일까
"당신의 척추는 안녕한가요?"
무슨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걸까. 이 글을 읽는 사람 누구도 척추 하나씩 가지고 있다.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온전히 가진 사람들 뿐일 것이다. 예상했듯이 척추는 은유일 뿐이다. 삶을 지탱하는 그 무엇에 대한 비유다.
누군가에게는 지겨울 수 있지만 군대 얘기를 꺼내야 할 것 같다. 그것도 가장 지루했던 말년 병장 때 이야기를 말이다. 하지만 꺼내야겠다. 만약 인간에게 평생 동안 각각 단어들에 대해 언급해야 할당량이 주어져 있다면, 분명 그때 난 척추라는 단어에 대한 할당량은 모두 채웠을 것이다. 그만큼 그 단어를 많이 썼다.
대부분의 병장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말년이 되자 앉아있거나 서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누워있거나 누워있었다. 서서해야 할 일은 앉아서 했고, 앉아서 해야 할 일은 누워서 했다. 그리고 누우면 잤다. 낮잠을 많이 자면 밤에 잠이 안 온다는 걱정이 사라진 것도 이때였던 것 같다. 그때 난 이런 표현을 많이 썼다.
"척추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별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몸에 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의지가 없어서 계속 기댔다. 마음이 군대 안에 있지 않고 이미 밖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몸은 군인이지만 마음은 이미 민간인이고 복학생이었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내 척추는 무사할까. 있다면 꼿꼿이 서있을까. 이등병에서 병장으로 계급이 올라감에 따라 중심과 동력을 잃듯이 어른으로 분류되는 20대 중후반 역시 그런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본격적으로 휘어지기 시작한다. 내가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게임하는 건 좋은데 똑바로 앉아서 해라"
척추의 안녕을 물은 건 이런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곳이 평생 직장이든 아니든, 천직이든 아니든, 우리가 100살까지 살든 말든. 그것이 삽질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척추를 똑바르게 세우고, 바른 자세로 삶을 사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너무 낭만적인가. 하지만 불의에 대해 적당히 분노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타인의 부정에 엄격하고 자신의 죄에는 관대해지는 모순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딱히 너무 낭만적인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오히려 현실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