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 에세이]
"100일의 시간을 준다. 이제 두 달 지났으니까, 못하겠으면 알아서 나갈 생각하고."
사장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아, 내가 정말 직장이란 곳을 다니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실어증에 걸리는 것처럼, 그 순간 사고가 정지됐다. 그 순간 내 머릿 속에 뜬 오류 메세지. 세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오류]외부 충격에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1. 시스템 재부팅
2. 진행하지 않음
3. 무시하고 진행
무시하고 진행했다. '네' '알겠습니다'만 반복했다는 뜻이다. 물론 그 대답에 진심은 없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기 기술을 시전했다. 그냥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지내는 요즘, 생존과 관련되지 않은 단어들은 삭제했거나 삭제 대기중이었으므로 상급자 앞에서, 정확히는 돈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건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난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았고, 돈이 필요하니까.
친구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직장과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힘들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장의 통보는 더 무겁게 다가왔다.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을 했는데도 이런 일은 생기는구나 싶었다. 남은 돈을 받고 일하니 이정도는 감수하는 게 당연한건가 싶었다.
일과 관련되지 않은 것들, 예를 들면, 많이 웃으라거나 힘을 더 쓰라거나, 목소리 크게 인사하라거나 하는 것들에 대해 지적을 받았다. 나 역시도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걸 반드시 해야만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는 못했는데, 역시 정글은 정글이다. 지적받은 그 사항들 중에는 사실이 아닌 게 많지만 그럼에도 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뭔가 반성하는 척, 그런 눈빛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 회의가 끝나고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냐'는 말을 들었으니 메소드급 연기였나보다. 척을 하는 건 내가 못하는 것 중 하나였는데, 꽤 많이 늘었나 싶었다.
날씨가 좋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러가기 좋은 날씨라고 말하지만, 비관주의나 냉소주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나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죽기 좋은 날씨라고 생각한다. 발디디고 있는 땅에 미련이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 죽지 않을 뿐, 살고 싶어서 사는 건 아니니까.
유독 안주거리가 많이 쌓였던 이번주, 주말에 만날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위해 안주를 맘 속에 조용히 넣어두었다. 주말에 모여 서로의 안주를 본 친구들은 각자 가져온 안주거리의 크기나 무게를 재지 않았다. 서로의 힘듦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힘듦에는 경중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 이게 어른이 되는 건지, 늙어가는 건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