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0일
'시인 + 밑줄'이라는 키워드를 초록창에 입력한 뒤, 무한한 인터넷의 바다를 떠돌다가 어떤 시를 발견했다. 그림도 없이 왼쪽 정렬된 시에는 궁서체가 적용되어 있었다. 그 게시물에는 감성을 자극하는 그림도 없었고 트렌디한 폰트도 아니었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몇글자의 제목이었다.
최승자 시인의 '나를 번역해다오'.
그 제목을 보자마자 내용은 읽지도 않은 채 좋아하게 됐다. 나를 번역해달라는 당당함과 '번역'이라는 단어가 주는 절대성이 좋았다. 원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번역은 태초의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절대적인 권력같았서 경외심이 들었다.
한국인 최초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인터네셔널 부분에서 수상했다. 그것을 두고 그 이유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었다. 가장 유력한 이유 중 하나는 좋은 번역가를 만났다는 것이다. 번역를 한 사람은 데보라 스미스라는 번역가로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직역을 하지 않고 의역을 했다는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사실 번역을 한다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닐 수 있다. 전문적으로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구글 번역기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한글을 영어로 바꿀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정말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그것을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 하나도 안 힘들어. 괜찮아"
나와 같은 벤치에 앉은 이 사람의 말. 그것을 직역해야 할까, 의역해야 할까. 번역을 한다는 것보다 더 낮은 단계의 과정이 우선일 수도 있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때 난 싫어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보다 많았다. 어쩌면, 어떤 것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이 있다는 게 나를 더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믿었던 것 같다. 싫다고 외치면 그게 나의 방패가 되어준다고 믿었지만 그 때문에 난 나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 싫어하는 감정에 빠져 허우적댔던 것 같다.
모든 이해는 오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좀 덜 오해하기 위해 대상을 좀 더 깊게 들여다 봐야 할 때다. 입으로 음성을 내뱉는 게 사람이지만, 그 음성은 의미의 단편에 불과하다. 유독 눈을 빤히 쳐다보는 아이는 잘 번역하기 위해서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눈빛과 찡그리는 표정에 손짓을 섞어 말하는 것, 그것들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좋은 번역자를 만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왠지 오늘은 김창완과 아이유가 부른 <너의 의미>를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