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

2016년 7월 15일 세탁기 소리만 들리는 밤 11시

by 김작가

"널 알게된 건 내 인생 최고의 불행이야"


한국 일일 가족극(이런 가족이 어딨죠?)에 쉽게 나오는 대사다. 주로 부셔버리겠어, 복수할 거야 등이 함께 쓰인다. '얼버무리다'라는 뜻의 equivocate. 토익 고급 단어장에 나오는 단어처럼 그런 대사는 평생 안 쓸 것 같다. 평생 안 써야 할 텐데. 그래야 할 텐데.


하지만 '널 알게되서 정말 다행이야' 라는 말은 살면서 한번쯤 하지 않을까. 아니, 마음으로는 이미 몇번이나 했지만, 내뱉는 게 부끄러울 뿐인 건가. 다행히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편이 라 난 며칠 전에도 그런 말을 했다. '널 알게된 게 정말 다행이야'


그런 아이가 있다.


우울한 것 같으면 힘을 주겠다고 약속부터 잡자고 하는, 기분이 아주 안 좋은 것 같으면 저녁에 약속 없으면 보자고 하는 , 육성이 아닌 1과 0으로 만들어진 고작 그 카카오톡 메시지에도 떨림이 느껴지는. 그렇게 달려온 아이는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마주 앉는다. 마치 우울한 주인의 기분을 알아주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조용히 몸 속에 파고드는 우리집 흰둥이를 안으면 몸보다는 마음이 더 따뜻해지곤 했다. 맞다. 마주 앉는 것, 마음의 온기를 느끼는 것, 그 이상의 위로는 없다.


얼마 전 인터뷰를 했던 길거리 사진가는 '왜 길거리 사진을 찍느냐'는 질문에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찍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사진을 보니 사진을 찍는다는 건 좀 더 숭고해보였다. 행선지도 다른 다섯 명이 한 사진 안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곱씹을수록 묘했다. 참 우연이라는 건 뭔지.


다행이라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났으면 좋겠다. 차마 진심이 아니면 입 밖으로 나오기 쉽지 않은 그 말을, 또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저녁이다. 오후 10시 4분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