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2016년 6월 15일

by 김작가
흑역사를 아는 고등학교 친구 외 1명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야, 말인지 막걸리인지 모를 이 말이 결과론적으로는 상당히 정확했다. 약속을 쉽게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약속의 대부분은 흐지부지 사라졌다. 특히 무거운 약속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깨지는 바람에 크게 놀랐다. 빠작.


1.중학생 때 L군과 내기를 했다. 그때 난 무려 방송국 피디가 꿈이었다. 엄마에게 <피디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선물로 사달라고 할 정도였으니 난 참 오랜 기간 동안 피디지망생이었던 것이다. 내기 내용은 이렇다. 내가 30살이 되기 전까지 피디가 되어 L군을 TV에 출연시키면 스쿠터를 선물로 받고, 실패하면 친구에게 양복 한 벌을 맞춰준다. 그때 왜 스쿠터와 양복을 말했는지 모른다. 그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현실적인 고급재였나보다. 아무튼 난 29.6살이고 6개월이 남았는데, 현실 가능성은 제로다. 친구는 양복 대신에 제주도나 같이 가자고 했다(더 비싸게 나오는 거 아니니). 그런데 이일 저일이 일일이 쌓이다보니 그 말을 한 지도 3개월이 지났다. 7월말에는 꼭 가자고 약속을 했다. 갈 수 있겠지?


2.고등학생 때 도서관을 가는 걸 좋아했다. 책은 안 읽고 친구들과 도서관에서 떠드는 걸 좋아했다(민폐남). 몇몇 친구들이 있었는데, 일찌감치 장래희망을 정한 내가 부럽다며 자기들도 꿈을 정하겠다고 했다. 한 명은 대통령, 한 명은 과학자, 한 명은 기억나지 않는다(안 친했다). 아시다시피 나도 실패 걔도 실패했다. 대통령이 꿈이었던 친구는 군인의 길을 가려다가 요리사를 하고있다. 대통령은 안 할 거라고 한다. 안 하는 거....맞나.


3.고등학교 3학년 때 도전 골든벨 촬영을 했다. 난 2번 동요문제에서 처참하게 떨어졌는데(정답이 장난꾸러기인데 사고뭉치라고 했다), 아시다시피 그때 꿈이 피디라서 방송촬영 현장 자체가 재밌었다. 촬영이 끝나고 모두가 김보민 아나운서(김남일 짱)에게 달려갈 때, 난 방송작가누나에게 사인을 받으러 갔다. 왜 김보민이 아닌 작가누나에게 갔냐고 묻는다면...김보민 아나는 제 스타일이 아닌데요. 아무튼 작가누나는 내가 귀여웠는지 이메일와 전화번호를 주고 공부 열심히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꼭 와서 연락하라고 했다. 아시다시피 이 약속은 지켰다. 골든벨 촬영 이후에 진학에 대한 조언과 책추천(체게바라 평전 등)을 꾸준히 해주셨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꾸준히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군대 이후에 연락이 끊어졌다. 나중에 <TV는 사랑을 싣고>가 생기면 이 고마움을 전해야지.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내가 싫어진 것일까. 영혼없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 심한 편이라 없는 말은 잘 안 하려 한다. 그만큼 있는 말에 대란 퀄리티가 높아진다고 난 주장한다. 요즘에는 '힘내' '화이팅' 이런 말을 멀리하고 있다. 카톡 대화창에 내가 이런 말을 썼는지 검색해보면 아예 없을 것. 힘을 내가 준 뒤에 내라고 하면 말이 되는데, 힘도 안 주고 힘내라고 하면 오히려 몸안에 힘은 더 줄어드는 게 아닌가. 힘은 안 쓸수록 좋지 않나(하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화이팅이나 열공 열일도 마찬가지. 화이팅이라는 말을 들으면 당장 싸우라는 것처럼 들린다. 대체어가 시급하다. 아자아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