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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Oct 03. 2016

가족관계(1)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은 한다. '나의 정체는 뭘까'


노트북을 두드리는 책상 위에는 세븐일레븐에서 900원에 사온 '깊은 산속 옹달샘물'이 있다. 이 녀석의 영양분석표를 보면 칼슘이 26.4 나트륨이 14.4 칼륨이 1.2 마그네슙이 2.8 불소가 0.3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있는 대부분의 상품들은 성분이라는 것이 측정되어있다. 그런데 나는 뭘까. 만약 내가 영화를 찍고있는 거라면 초반에는 가족을 찾아가서 묻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나를 가장 오랫동안 봤던 분들이며 나를 낳고 길렀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도 기억하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소개서에서 가족관계에 대한 분량은 왜 항상 짧아도 되는 것인가.


아버지와 나

나는 아버지를 존경한다. 내가 만약 새로운 지구를 건설하는 미션을 받은 조물주라면 아버지를 태초의 인간으로 내려보낼 것 같다. 그만큼 아버지는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고 그에 비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정함은 조금 부족하시지만 지구를 건설할 때 다정함은 필요없으니까. 올해 직장인이 되고 아침 7시에 일어나는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아버지의 발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S그룹에 다니셨는데, 5시에 일어나 출근을 하셨다. 그때는 아침일까 새벽일까 헷갈릴 여지없는 새벽이었기에 밖은 어두웠다. 아버지는 새벽 5시가 되면 조용히 일어나 욕실에서 세수를 했다. 욕실의 불은 주황색이라 욕실 옆에 있는 나의 방은 그때가 되면 잠시 주황색일 띄었다. 나는 불빛과 씻는 소리에 잠을 깼다. 학교에 가는 것을 아주 많이 싫어했던 나는 잠에서 깨는 것을 즐겼다(변태는 아니다). 하지만 눈만 뜨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물로 씻는 소리를 듣고 '탈칵'하며 버튼을 눌러 불을 끄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옆으로 누워있어서 아버지의 뒷꿈치를 보았는데, 그 모습을 수백번은 보았을 것이다. 그때는 그 성실함이 당연하게 느껴졌는데, 나는 아직도 종종 지각을 한다. 성실하지 못함은 온전히 나의 탓인 것만 같다. 아버지가 공부를 놓지않았으면 훨씬 위대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 확신한다.


어머니와 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안타깝다. 어머니는 돈을 아끼려고 희생을 했다. 어머니는 형과 내가 초등학생이 되자 일을 시작하셨다. 전자제품 부품을 조립하는 공장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을 하셨는데, 점심은 꼭 집에서 드셨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셨고, 점심 시간에도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공장에는 방글라데시 사람도 있었고, 파키스탄 사람도 있었다. 인종차별은 없었고, 그저 신기해했다고 했다. 공장 가까운곳에는 식당이 있어서 조금만 걸어가면 매일 다른 메뉴의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항상 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와서 김치와 밥을 먹었다. 야근을 하는 날이면 저녁에 공짜로 햄버거가 나왔다. 햄버거는 롯데리아 햄버거도 아니었고, 맥도날드도 아니었다. 이름도 없는 은박지에 포장된 햄버거였다. 어머니는 햄버거를 받으면 안 먹고 가지고 오셨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햄버거가게가 롯데리아 뿐이었고, 특별히 용돈을 주지 않으면 햄버거를 사먹기란 힘들었다(대신 PC방에 갔다). 그래서 어머니가 가져오는 햄버거가 기다려졌다. 형과 나는 햄버거를 칼로 반으로 잘라 먹었다. 매운 양파가 들어간 것이 특징이었는데, 나는 양파를 빼고 먹었다. 나는 엄마에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사주고싶다.


형과 나

형은 대단한 사람이다. 형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항상 전교 10등을 벗어나지 않았고, 스타크래프트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스타크래프트가 유행하던 시절, 뉴스에서는 '게임 잘하면 머리 똑똑하다'라는 보도를 새로운 소식인 것마냥 전달했는데, 난 형을 보고 일찌감치 알고있었다. 고등학생이 된 형이 첫 모의고사 시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언어는 2등급이었는데, 부모님은 생각보다 기뻐하지 않으셨다. 잘했다고는 했지만, 원래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언어 2등급 어려운건가? 내가 맞아주지!' 라며 포트리스를 하며 속으로 다짐했던 나는 언어 3등급의 문턱을 한 번도 넘지 못하고 졸업을 하고만다. 형은 선생님이 되겠다며 국문학도가 되지만 서울에서 놀이의 즐거움을 깨닫고 교육자의 길을 포기한다. 군대를 다녀온 형은 의대에 진행하겠다며 전격발표를 한다. 1년 동안 공부한 형은 수능을 다시 치고 정말 의대에 진학한다. 그때 난 형과 같은 원룸에 살았는데,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운동을 한 뒤 밤 11시에 들어왔다. 가끔 점심 시간마다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 빼고는 다른 생활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던 나는 형에게 "형은 공부에 집중이 안되면 뭐하냐"고 물었고 형은 명언을 남겼다. "영어가 재미없으면 수학 공부하면 되지" 난 아직도 공부를 못하고 형은 곧 의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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