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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Mar 23. 2017

유리벽을 지켜보는 여자

영화 <미스 슬로운> 리뷰 by 김작가

-서론

초등학교 6학년, 교무실 청소를 했었다. 교무실의 창문은 유리로 되어있었고, 소리는 확실히 차단되어 밖으로 소리가 세어나가지 않았다. 선생님들의 아침 회의가 끝나면 우리는 교무실로 들어가 바닥을 쓸고, 닦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회의가 끝났고, 청소를 했다. 청소가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날 회의 중 청소 담당을 바꾸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것을. 교무실에서 학생들이 청소를 하며 시끄럽게 수다를 떤다는 게 이유였다. 그때 처음 권력을 느꼈다. 권력자에게 유리 창문이라는 건, 투명한 듯 보여도 본질을 가리는 속임수인 것만 같았다.


미스 슬로운은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수단에는 '사람'도 포함된다.


-줄거리

<미스 슬로운>은 유리벽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한 로비스트의 이야기다. 업계에서 인정받는 상위 1%의 로비스트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그녀는 총기 규제 법안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총기 규제 찬성의 편에 선다. 하지만 재벌과 권력의 편이 아닌 약자의 편에 선 대가는 컸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위험에 빠지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슬로운의 전략에 주변 사람들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관객들은 이 영화의 장르가 ‘스릴러’임을 주목하길 바란다. 분명 폭력도 없고, 액션도 없지만,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오로지 '법'과 '논리'로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서늘하게 끌고 간다. 이해하기에 쉬운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를 더 좋아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빅쇼트>를 공부하듯이 보고 또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엄마가 주는 보양식 같은 느낌이다. "이거 먹어" "뭐야 그게?" "몸에 좋은 거야 일단 먹어" <미스 슬로운>은 일단 보면 좋은 영화다. ‘부패한 거대 권력에 맞선 신념’이라는 소재는 몇 개월간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했던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기에 좋은 주제임에 틀림없다.


슬로운의 총기규제 법안에 대한 찬성으로 한순간에 팀이 분열된다.


-오프닝

영화는 슬로운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로비의 핵심은 통찰력이에요.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한 후, 대책을 강구해야 하죠. 승자는 상대보다 한 발자국 앞서서 상대를 놀라게 만들되 난 결코 놀라선 안돼.”


어떤 영화는 영화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오프닝을 할애하지만, 또 다른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 하나에 영화의 내용을 함축시킨다. <미스 슬로운>이 그렇다. 슬로운의 위 대사를 '영화 한 줄 요약'으로 봐도 무방하다. 로비에 대한 슬로운의 생각은 구성적 측면이 아닌 내용만 봐도 훌륭하다. 영화 관계자가 보면 좋겠다.


영국 드라마 <셜록 홈스> 이후에 한국의 영화들은 한국판 셜록이라며 두뇌를 쓰게 만드는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영화가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슬로운의 조언과는 반대로 했기 때문이다. 관객보다 한 발자국 앞서서 놀라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 예측 가능한 전개만 보여준 영화는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올해도 또 몇편의 두뇌영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대사

직업의 하나로 인정받는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고,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는 조심성이 많고, 흔적을 절대 남기지 않는 슬로운을 보면 마치 세계 곳곳에 자금을 숨겨놓고 찾으면 찾아보라는 미세스 최순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슬로운과 최순실의 차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대사 하나로 정리된다. “신념 있는 로비스트는 자신의 승리만 믿지 않는다” 최순실은 주변 사람을 믿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승리와 돈만 믿었다.


-미장센

영화에는 유난히 유리벽이 많이 등장한다. 제목에 '유리벽을 지켜보는 여자'라고 했던 이유도 그만큼 영화에 '유리'가 빈번히 등장했기 때문이다. 치밀한 설정이다.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회의실과 사무실이 등장하고, 카메라는 유리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유리의 안과 밖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사람은 미스 슬로운이다.


유리벽 밖에서 두 남자의 대화를 본 그녀는 말한다. “유리로 벽을 만든 건 누구 생각이에요? 제가 입술 모양을 읽을 수 있거든요.” 우리에게도 창문 너머의 그들만의 암호를 읽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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