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소리만 들리는 밤
"널 알게 된 건 내 인생 최고의 불행이야" 한국 일일 가족극(이런 가족이 어딨죠?)에 쉽게 나오는 대사다. 부셔버리겠어, 복수할 거야 등이 함께 쓰인다. '얼버무리다'라는 뜻의 equivocate. 토익 고급 단어장에 나오는 단어처럼, 그런 대사는 평생 쓸 일이 없을 것만 같다. 평생 안 써야 할 텐데. 그래야 할 텐데.
하지만 '널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라는 말은 한 번쯤은 하지 않을까. 아니, 마음으로는 이미 몇 번이나 속삭였지만, 내뱉는 게 부끄러울 뿐인 것 같다. 다행히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편이라 난 며칠 전에도 그런 말을 했다. '널 알게 된 게 정말 다행이야'
그런 아이가 있다. 우울한 것 같으면 힘을 주겠다며 약속부터 잡자고 하는, 기분이 아주 안 좋은 것 같으면 저녁같이 먹자고 하는, 내 시간을 너에게 줄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하는 아이. 촉감이 없고 육성이 아닌 1과 0으로 만들어진 고작 그 카카오톡 메시지에도 떨림이 느껴지는 그런 문장을 만들 줄 아는 아이. 허무하게도 그렇게 달려온 아이는 “미안 내가 아직 어려서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며 마주 앉는다. 우울한 주인의 기분을 알아주며 웃지 않고 꼬리만 조용히 움직이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말없이 몸속으로 파고드는 우리 집 흰둥이를 안으면 몸보다는 마음이 더 따뜻해지곤 했다. 마주 앉는 것, 마음의 온기를 느끼는 것, 그 이상의 위로는 없다.
얼마 전 인터뷰를 했던 길거리 사진가는 '왜 길거리 사진을 찍느냐'는 질문에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찍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사진을 보니 사진을 찍는다는 건 좀 더 숭고해 보였다. 행선지도 다른 다섯 명이 한 사진 안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들의 운명을 카메라 속에 훔쳐왔다. ‘다행’이라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났으면 좋겠다. 차마 진심이 아니면 입 밖으로 나오기 쉽지 않은 그 말을, 또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저녁이다. 오후 10시 4분이다. 다행이다. 세탁기 소리만 들리는 늦지 않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