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저녁은 언제였을까
"오빠, 나 사랑하긴 해?"
약간의 침묵 뒤에 이어진 남자의 확신 없는 한 마디 "당연하지". 여자는 아마 그 침묵으로 확신했을지 모른다. 당연하지, 그 한마디 말보다 침묵이 더 크게 들렸으니까.
'이 남자는 나를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렇게 여자는 이별을 결심했다. 그 골목길이 둘의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몇 년 뒤,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남자는 문득 그동안 연애다운 연애, 또 사랑다운 사랑을 했던 계절은 얼마나 됐을까 되짚어 보고 싶었다. 한 명씩 얼굴을 떠올리며 손가락에 발가락을 더해 숫자를 세려 본다.
'하연이, 희재, 수아... 아, 걔는 사귄 게 아닌가?'
천천히 지난날과 지나간 여자들을 떠올리며 연애를 하면 성장한다는 말에 뼛속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감정의 끝에 다다르면 변하는 자신을 보며 '내가 어떤 사람인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이든지 말이다.
언제는, 지금 죽어도 될 것처럼 행복함에 휩싸였다가 또 언제는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좌절하고, 화가 날 땐 문자 그대로 눈이 뒤집히기도 한다. 그러다가 화해하면 또 행복하고 싸우면 불행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널을 뛰는 이런 과정이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사람 한 명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까.
맛있는 파전을 굽기 위해 뒤집어가며 골고루 노릇노릇 익혀야 한다. 그래야 맛있는 파전이 만들어진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팔 할이 롤러코스터 같았던 그 연애였다. 2년 전 이맘때였다. 4년을 함께 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세상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았다.'는 한 소설가의 말을 온몸으로 느꼈다.
물론 이별이라는 결과는 남자가 여자를 먼저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파생된 것이지만 말이다. 이별 뒤 남자는 좀 더 철이 들었다. 그 덕분에 지금의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있으니 내심 고마워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오늘 2년 만에 연락이 왔다.
-오빠 잘 살아?
약간의 침묵, 아니 오랜 침묵 뒤에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답장을 보냈다.
-오랜만이다! 넌 잘 지내?
씨네 21 인터뷰였던가. 언젠가 영화배우 정유미에 대해 이런 묘사를 본 적 있다. '사전에서 말을 찾듯 한마디 한마디를 고르며 대답하는' 대답이 느린 정유미에 대한 묘사였다. 여자도 그랬다. 아름다운 단어와 표현을 좋아했고, 감동할 줄 알았다. 말을 신중하게 하는 여자는 2년 만에 연락을 하였으니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을까. 여자는 지금 프랑스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광고 쪽으로 일하고 싶다고 했는데, 지금은 난민을 돕는 일을 한다고 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이렇게 타국에서 일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고, 심지어 난민을 도우는 일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진짜 세상일 모르는 거네. 의외다 진짜. 한국엔 언제 와?
-아마 12월쯤? 여기서 너무 드라마틱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 들려줄 얘기가 많겠다. 한국 가면 연락할게!
왜 하필 오늘 그리고 지금 연락이 왔을까. 덕분에 남자는 확실히 알게 됐다. 몇 번을 만나도 다시 시작하거나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좋은 사람이었고, 남자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이지만. 스스로가 너무 중요하고 소중해서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 여자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것, 아무리 친해도 거리를 두는 것, 그게 이별 이후의 삶의 원칙이었다. 벽을 켜켜이 쌓고, 혼자만의 방을 만들고, 관을 짰다. 절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딱딱한 관 속에서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게 숨어있지만 누군가 노크를 해주기를 기다리는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남자는 이별 후유증을 크게 겪었다. 미안했지만 헤어진 것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좋은 사람과 헤어졌으니 어쩌면 다신 사랑을 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과 헤어졌으니 다음에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조심스레 혼잣말을 자주 했었다.
-이거 새로 나온 라이언 이모티콘. 너무 귀엽지?
-오빠 꺼도 선물 뿅. 나 우울할 때 많이 보내줘요 히히
결혼이라는 거, 해도 괜찮겠지? 남자는 서툴지만 스스로를 밀어보려 애쓰고 있었다.